[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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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사과를 만나다 박연옥

길어야 일주일쯤 머무는 줄 미리 알아

올핸 꼭 만나리라 서둘러 꽃 피워놓고

받침이 집인 줄 모른 채 사과꽃은 지더니

떠난 자리 들어선 열매 뙤약볕에 담금질하고

비바람에 지는 벗들 가슴으로 배웅하며

모질게 견뎌온 나날 과즙으로 고이더니

끝내 그를 알고 안절부절 못하는 낯빛

그걸 헤아린 듯 크게 한 입 베어 무니

달디단 사과향 속으로 그림자 두엇 잠긴다

당선자 박연옥씨 소감

어려서부터 말수가 적던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여럿이 어울릴 때마다 언제나 뒷전에서 서성대던 나. 그런 나에게 시는 마음의 언어였고 시조는 언어의 중요한 일부였다.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얼떨결에 월 장원을 하고나서부터 내가 버린 밤은 얼마이며, 맞이해야 했던 바람은 또 얼마였던지. 이제 빈 그릇 하나 조용히 내 앞에 갖다 놓는다. 이 그릇에 내 운명처럼 담아내야 할 3장 6구 푸른 파도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박재삼 선생님의 고향에서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 오늘은 다도해가 보이는 남해 금산,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 보러가야겠다. 글쓰기를 이해하고 보살펴 준 가족들과 멀고 가까운 여러 이웃께 감사한다.

◆약력=▶1959년 경남 사천 출생▶2001년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신인문학상을 가리는데 올해도 치열한 논의를 거쳤다. 당선작 '사과를 만나다'는 따뜻한 관찰을 통한 시간의 육화가 일품이다. '받침이 집인 줄 모'르고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다시 앉아 '과즙으로' 고이는 과정이 사뭇 그윽하다. 시조 종장에서는 조심스러운 '지더니', '고이더니' 같은 결구도 셋째 수에서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다른 작품의 고른 수준과 종장 처리 능력이 평가에 한몫했음을 밝힌다. 이번 심사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미학적 완성도다. 참신성을 형식에 잘 앉히지 못할 경우, 이후의 작품이 흔들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끝까지 논했던 김대룡.김주용.연선옥.임채성.정상혁.조은아 제씨는 이와 같은 이유로 순위에서 밀렸다. 이미지와 형식이 겉돌거나(김대룡.김주용.정상혁), 의미의 과잉(임채성) 혹은 공소한 내용(연선옥.조은아) 등이 지적되었음을 덧붙인다.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심사위원 : 유재영·이한성·김영재·이정환·이지엽·정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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