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갈등의 한해를 마감하며(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우리는 1년전 90년대의 첫장을 여는 원단에 정체의 늪에서 벗어나 다시 전진의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 미래지향적 신사고로 온 국민이 결단하고 행동하기를 촉구한 바 있다. 내부의 불화와 갈등을 대승적차원에서 화합과 공존으로 해소함으로써 외부세계의 변화가 마련하고 있는 기회를 놓지지 말것과 정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임을 역설했다.
그러고서 1년이 지난 세모에 서서 지난 한해를 되돌아볼 때 구각에서 헤어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수렁속에 한걸음 더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화상을 보게 된다. 물론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와 교류의 본격화나 남북한간의 참을성 있는 대화지속,지자제실시를 위한 일정과 방법의 확정등 몇가지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각한 불신의 확산
그러나 국회는 의안의 날치기통과 후유증으로 무려 4개월간이나 공백이 계속됐으며,밀실에서의 삼당통합이라는 정치적 지각변동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정치지도자들의 무능과 결단력부족으로 인한 내부분열과 파쟁,여기서 연유되는 정책의 부재와 표류는 국민을 정치에 대한 염증과 정부에 대한 불신에 빠지게 했다.
여야관계는 국사의 본질 접근 보다는 극한적인 감정대결 양상을 탈피하지 못했고 정치는 국가를 이끌어 가지는 커녕 「사회불안의 진원」이라는 지탄을 면치 못했다.
공직자들의 고질적인 부정부패는 더욱 심회됨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조직폭력과 상부상조적인 연계를 갖고 이들을 비호하고 나서는가 하면,이들 비리를 징치해야할 사법권이 이들과 공조관계를 노정시킴으로써 거꾸로 이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공판을 열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공직자의 비리와 공권력의 혼미는 급기야 공권력에 대한 불신의 차원을 넘어 이에 대한 도전의 위기로 까지 몰고간 것이다.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는 법질서의 문란과 황금만능사고,한탕주의가 차지했다. 부동산투기와 즉석복권,마권 따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몇푼의 돈을 빼앗기 위해 무더기 살상과 성폭행·인신매매 등 극악스런 폭력을 휘둘러 댔다. 보험금을 노린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가 딸을 윤락가에 팔아넘기는 패륜의 범죄까지 일어났다. 당국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나 마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패덕과 반인륜적 범죄는 오히려 더욱 기승을 떨치며 더욱 연소화·흉포화·조직화·광역화하는 양상이다.
마약범죄 또한 더욱 광범위하게 우리생활 주변 깊숙히 확산돼 가정과 농촌구석까지 파고들었고 심지어는 술집에서 매상을 올리는데 까지 악용되는 실정이다.
이런 배금사상·도피주의와 한탕주의는 근면과 성실을 신봉하는 국민들의 가치관을 붕괴시켜 정신적인 황폐를 초래하고 국가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많은 노동력이 힘든 일을 기피하여 생산과 노동현장을 떠나 손쉬운 서비스업으로 몰렸다.
○민생치안 더 힘써야
공장에서는 생산성이 저하된 반면 불량률이 높아지고 이는 곧 제품의 대외신용도를 훼손함으로써 수출에 타격을 주고 국가경제체질을 약화시켰다. 만연일로의 향락·과소비 풍조는 사치성 외제품수입을 촉진시켜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반 부정적인 현상은 우리사회체제가 붕괴되는 징조가 아닌가 하는 불안과 위기감을 국민에게 안겨주는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혹자는 이런 현상을 오랜 권위주의체제 아래서 체질화된 타율적 질서가 자율적 민주체제로 전환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더러는 후기산업사회가 겪어야 할 불가피한 일시적 진통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부정적인 현실의 개선과 타파를 막연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황의 발전에만 맡겨두고 기다리기에는 현실이 너무 절박하고 심각한 중증이다.
○개혁으로의 실천의지
정치는 잘못된 구습과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 사고와 행동에 일대 혁신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도층과 공권력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도덕성을 확립하여 국민의 신망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만연된 비리와 범죄 앞에서 권위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이다.
국민들 또한 과소비와 향락풍조를 진정시키는데 각자가 자제력과 절도를 찾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기풍을 건전하게 변화시키고 앞으로 밀어닥칠 국제적인 통상압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각성과 자제가 바로 열쇠임을 인식해야 하다.
사회의 무질서와 지도층의 오욕으로 얼룩진 경오년이 저물어 간다. 우리가 잘못된 한해를 되돌아 보며 우려하고 개탄하는 것은 보다 개선된 다음 해를 갈구하는 간절한 기원 때문이다. 90년대의 첫해를 그냥 역사 속으로 넘겨버리지 못하고 반성과 자책의 매듭으로 접어두려 함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신미 새해에는 결코 되풀이 돼서는 안될 악덕의 유산임을 우리 국민모두가 반성과 경각의 자료로서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