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경영 40년 전 얘기…부당지원 규제, 폐지나 2촌 축소를" [시대 뒤처진 대기업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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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기업집단 제도를 국내 기업 현실을 반영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대표적인 게 동일인(총수) 관련 규제다. 현재는 총수의 혈족 4촌, 인척 3촌과 계열회사 임원까지 모두 특수관계인으로 묶는데, 적어도 이 범위라도 줄여야 한다는 취지다. 직계가족 이외에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일이 이젠 사실상 없는데도 친족 관련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게 기업에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15일 중앙일보가 2004년부터 최근까지 20년간 공정거래위원회가 부당지원ㆍ사익편취 혐의로 제재한 63건의 의결서를 분석한 결과 주된 부당지원 대상이 총수(동일인)의 2촌(형제ㆍ자매) 범위를 넘어선 경우는 1건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마저도 15년 전이다.

3촌 이상 부당지원, 15년 전이 마지막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전체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33건은 계열회사 부실로 인한 퇴출을 막기 위해 보증을 서거나 공공기관이 자회사를 지원하다 적발된 경우였다. 나머지 30건이 총수 일가에 대한 지원인데, 대부분이 아들ㆍ딸 등 2세 지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으로 보면 19건에서 주된 지원 대상은 총수 2세였다. 나머지 11건 중 5건은 총수 본인, 4건은 형제ㆍ자매, 1건은 배우자, 1건은 4촌이 주된 부당지원의 대상으로 이름을 올렸다.

4촌이 지원객체가 된 건 GS의 계열사(스마트로)였는데 그마저도 15년 전인 2009년 사건이다. 특히 제재가 이뤄지기 전 총수 관련자 지분을 모두 매각하면서 계열사에서 제외됐다. 공정위가 총수의 친족(혈족 4촌ㆍ인척 3촌)의 각종 자료를 제출토록 하는 건 친인척 간 일감 몰아주기 등 부당지원을 막으려는 취지지만, 실제론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을 규제하고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세 부당지원 감시망 좁혀야 하는데

그런데도 공정위는 여전히 혈족 4촌, 인척 3촌은 물론 계열사 임원까지 특수관계인으로 포함한다. 이들의 주식 소유 현황 등 광범위한 자료제출이 의무로 붙는다. 공정위에 따르면 총수 있는 기업집단 78곳의 자료 제출 의무가 있는 친족은 5000명이 넘는다. 총수 1명이 친ㆍ인척의 주식 소유 현황 등 70여명의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규제 대상이 넓은 만큼 2세 승계 목적의 부당지원에 대한 감시망이 헐거워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기업집단 규제가 도입된 1986년만 해도 이른바 족벌경영이라 부르던 한국식 재벌 체제가 사회적 문제였다. 그러나 이후 계열분리 등이 이뤄지면서 직계가족 중심으로 기업집단도 재편됐다. 예컨대 2000년 이후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나왔고, GS도 LG와 별도로 기업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2022년엔 LX가 LG에서 분리됐다.

40여년 새 기업도 바뀌어

이봉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규제 도입 당시엔 몰라도 최소한 지금은 4촌 기업에 부당지원을 할 만한 기업이 남아 있지 않다”며 “자료 제출 의무는 총수에게 부과되는데 기업을 경영하는 총수가 수십ㆍ수백명의 친척 상황을 알 것이라는 전제 자체도 문제”라고 말했다.

가장 최근 부당지원으로 제재를 받은 세아그룹의 경우 주력 기업인 세아제강의 지난해 매출(1조8609억원) 중 해외 매출이 1조133억원으로 54.5%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이 수출에 주력해 해외 기업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촌수를 따져가며 자료를 제출하도록 하는 규제가 성장의 족쇄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친족범위 좁히거나, 법인을 총수로”

공정위는 이달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자연인이 아닌 법인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날 쿠팡과 두나무만이 해당 요건을 충족해 법인이 총수로 지정됐다. 쿠팡을 예로 들면 김범석 의장은 친ㆍ인척 등에 대한 지정자료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 공정위는 이에 대해 “법인이 총수라고 해도 상호ㆍ순환출자 금지 및 부당지원행위 금지 규정 등이 동일하게 적용돼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총수 지정과 친ㆍ인척 자료 수집을 통한 사전 규제가 아닌 사후제재로도 부당지원 등을 충분히 감시할 수 있다고 공정위 스스로 밝힌 셈이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쿠팡 외 다른 기업도 총수를 법인으로 지정해도 제재할 수 있다”며 “총수를 법인으로 지정하는 걸 일반화시키든, 총수 자료제출 범위를 직계가족이나 2촌 수준으로 줄이든 규제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남훈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단 총수 개인에게 부여하는 규제가 과도한 만큼 법인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미국ㆍ유럽처럼 정부가 아닌 주주들이 기업 지배구조를 감시하고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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