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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수감생활 복수심 없었다” ‘박근혜 회고록’ 취재 뒷얘기

  • 카드 발행 일시2024.03.20

오늘 방송에서 다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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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 박근혜, 긴 수감생활에도 복수심 없었다
(06:25) 탄핵 정국에도 끝내 지소미아 추진한 이유
(11:35) 박근혜 측근은 최태민 아니라 그의 아내
(19:15) 역대 대통령 회고록, 빨리 기록돼야 하는 이유
(20:20) 박근혜 회고록 다음 작업은 반박 인터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여러 기록을 세운 인물입니다. 여성으론 처음이었고, 아버지에 이어 2대째 대통령직에 오른 것도 최초였습니다. 헌정 사상 탄핵으로 파면당한 첫 대통령입니다. 박근혜 회고록은 더중앙플러스 연재를 마치고 지난 2월 책 『박근혜 회고록: 어둠을 지나 미래로』(중앙북스)로 출간됐습니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습니다.

오늘 ‘뉴스 페어링 팟캐스트’는 박근혜 회고록 집필진 중 한 명인 유성운 정치부 기자를 초대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30번 넘게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내용과 취재 뒷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팟캐스트 방송으로 들어보시죠.

🎤진행 : 이경희 기자
🎤답변 : 유성운 정치부 기자

▷이경희〉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정치적 영향력으로는 3김에 비견되기도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하지만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면서 탄핵으로 파면이 된 첫 대통령이 됐는데요. 4년9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2021년 사면된 뒤 대구 달성군에서 칩거하던 박 전 대통령은 사면 후 처음으로 중앙일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더중앙플러스에서 단독 연재되며 화제를 모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 회고록, 지난달 책으로도 나왔는데요. 오늘 ‘뉴스 페어링’에서는 회고록 집필진 중 한 명인 유성운 정치부 기자를 모셔서 그 뒷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진행을 맡은 이경희 기자입니다. 그럼 유성운 기자 바로 모셔볼게요. 안녕하세요.

▶유성운〉 예 안녕하세요.

▷이경희〉 ‘박근혜 회고록’ 굉장히 오랫동안 준비해서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들었는데요. 이 프로젝트가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유성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시점부터 따지면 작년 4월 초부터고요. 프로젝트가 추진된 거로 따지면 2022년 가을부터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경희〉 실제로 인터뷰, 몇 번이나 만나셨나요?

▶유성운〉 저희가 아마 매주 만나기도 하고, 2주에 한 번씩 만나기도 했는데 총 횟수로 따지면 4월부터 12월까지 32번 정도 만난 것 같아요.

박근혜, 긴 수감생활에도 복수심 없었다

2023년 9월 11일 박근혜 전 대통령.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자택에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23년 9월 11일 박근혜 전 대통령. 대구시 달성군 유가읍 자택에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경희〉 실제로 만나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어떻던가요?

▶유성운〉 고령, 70세가 넘은 나이에 감옥에 있었고, 또 4년9개월이라는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긴 시간을 감옥에 있다 보니까요. (제가) 정치부에 있을 때, 예전 정치인들 중에 검찰 수사받고 감옥에 갔다 온 분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그 전과 후가 좀 달라진 경우가 많았어요. 세상에 대한 증오랄지 분노랄지 이런 게 있는 경우가 있었고, 또 ‘반드시 복수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도 있었고요. 그런 걸 보면서 박 대통령도 그런 게 강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없잖아 했는데요. 생각보다는 굉장히 차분하고 절제된 톤을 유지하면서 말씀을 해서 그런 점에서는 좀 되게 의외였다, 사실은 그런 생각을 좀 했어요.

▷이경희〉 사실 말씀하신 것처럼 박 전 대통령이 52년생이니까 만 72세고, 회고록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4년이 넘는 긴 수감생활로 건강이 이미 상했다고 밝히기도 했었고, 그런데도 멘털이나, 정신 건강이나, 기억력이 다 괜찮던가요?

▶유성운〉 그게 사실은 좀 아쉬운 부분인데요. 판단력이라든지 정신 상태라든지 이런 거는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양호했는데, 문제는 탄핵 당시 갑자기 구속돼서 바로 구치소로 들어가다 보니까 기록을 챙기지 못했더라고요. 대통령 임기 동안의 기록을 차분히 챙겨서 나왔어야 되는데 그런 걸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감옥에 들어가서 거기서부터 4년9개월의 수감생활이 시작되다 보니까 구체적인 기억은 아무래도 조금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어요.

정책 부분이라든지, 예를 들어 “미국 오바마 대통령 만났을 때 무슨 말씀 나누셨나요? 산책하시면서 그때 무슨 말씀 나누셨어요?” 그러면 본인이 굉장히 그걸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억이 안 나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런 부분은 좀 아쉽게 남았습니다.

▷이경희〉 그러면 박 전 대통령의 기억이나 진술 외에 집필진들이 자료 조사를 해서 보충한 부분이 꽤 많았겠네요.

▶유성운〉 아무래도 박 전 대통령이 준비해 놓은 게 없기 때문에, 또 도와줄 분들도 없었어요. 사실은 보통 대통령이 퇴임하면 그 당시 청와대에서 같이 일했던 비서진이라든지 그런 작업을 도와주는데 박 전 대통령 같은 경우는 탄핵으로 물러나면서 도왔던 비서진이라고 해야 되죠. 청와대에서 일을 도왔던 분들도 다 안 좋은 결말을 맞았죠. 감옥에 가기도 하고 수사받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모아서 뭔가 작업을 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형편이 있었던 거죠.

환경이 그렇다 보니까 저희가, 저희라는 건 회고록 팀을 말합니다만, 회고록 팀이 기록이나, 옛날 기사 등을 보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질문해야겠다, 그리고 몇몇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인 자료를 보이고, 다시 기억을 되살리게끔 했죠. 그러니까 대체로 한 2주 전쯤 질문지를 보내면 박 전 대통령이 한 2주 정도 준비를 한 뒤, 저희가 질문을 하면 답변을 해주는 식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이경희〉 그런 장치를 통해서 그래도 조금 얻어낼 만큼은 얻어내신 거라고 판단하신 거죠.

▶유성운〉 저희가 가장 묻고 싶었고 궁금했던 부분들은 거의 다 해소는 된 것 같습니다.

▷이경희〉 예를 들어 아베 신조 총리 회고록을 번역하고, 그 자료까지 찾아봐서 또 질문했다는 뒷얘기도 들었는데요.

▶유성운〉 네, 그렇죠. 그러니까 박 전 대통령이 아무래도 그런 기록이 미비하다 보니까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끌어모아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찾다 보니까 마침 작년 2월에 일본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 회고록이 나왔고, 일본 지인한테 물어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부분이 나와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박 전 대통령하고 아베 신조 총리하고 재임 기간이 다 겹치기 때문에, 그래서 특히 위안부 협상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많았고 박 전 대통령도 굉장히 나름 의욕을 갖고 추진했던 부분이라서 이런 거에 대해서 그러면 아베 신조 총리는 어떻게 말했을까, 또 어떻게 회고할까 궁금해서 그런 것까지 다 뒤지면서 최대한 조금의 파편이라도 다 끌어모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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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정국에도 끝내 지소미아 추진한 이유

▷이경희〉 제가 회고록 보면서 좀 놀랐던 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일단 박 전 대통령이 주요 정책에 대해서 예컨대 위안부라든지 지소미아라든지 굉장히 확고한 생각과 의지를 갖고 추진했다는 부분이었어요. 국정농단으로 파면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사실 언론에서 보여준 박 전 대통령의 이미지가 그렇게 본인의 의지와 생각을 명확히 갖고 있다기보다는 뭔가 휘둘린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회고록에서는 그게 사뭇 다르게 나타나서….

▶유성운〉 그것도 사실 저도 좀 진행하면서 놀랐던 부분인데요.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마지막 탄핵 과정이 그렇다 보니까, 비선 실세한테 휘둘리고 본인이 어떤 주체적으로 뭘 판단을 한 게 아니라 특정인에게 휘둘리면서 국정을 이끌어간 거 아니냐, 그런 이미지가 강했는데 막상 또 만나보니까 아까 말씀하신 문제들 예를 들면 한·일 지소미아 체결이라든지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든지 이런 건 본인이 뚜렷한 의지를 갖고 추진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또다시 생각을 해보면 박 전 대통령이 98년도에 정계 입문하고,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랑 경선에 붙었을 때 이미 대통령이 되겠다고 마음을 갖고 나선 거잖아요. 그리고 5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도 이제 많이 그 근처에 모였고 유승민 전 의원이라든지 여러 의원들이 모였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걸 추진해야 되나, 어떤 정책을 펴야 되나, 당연히 논의를 했을 거고 그런 큰 틀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아마 초등학교 때 청와대를 들어갔을 텐데 그 부친을 따라서 28~29살 때까지, 79년 10·26 사태 전까지 청와대에 있었던 건데, 약 18년 정도 됐을 겁니다. 아마 그 18년을 옆에서 쭉 보면서 ‘대통령이라는 건 뭘 하는 거구나’ 그런 걸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 같아요.

또 퍼스트레이디도 했었고요. 박 전 대통령이 그래서 지소미아 문제도 그렇고 좀 껄끄러운 문제들 추진할 때 국민들이 별로 크게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강행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물어보면 부친이 경부고속도로 야당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했던 거를 많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대통령이라는 건 어쨌든 결정하는 자리고, 그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리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자기가 결코 양보하거나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고 또 이런 걸 결정하려고 내가 대통령이 됐지, 만약에 이런 거를 다른 사람한테 미룬다, 국민 여론에 물어서 맡긴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대통령이 왜 필요하겠냐,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서 확실히 그런 어떤 부분은 좀 훈련돼 있는 정치인은 맞긴 맞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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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드러낸 크롬웰 초상화처럼 과오도 담겠다

▷이경희〉 회고록에서 또 예민하게 나온 부분들이 다 언급이 되긴 했어요. 세월호 ‘잃어버린 7시간’이라든지 정윤회 문건 등등 이런 예민한 부분이나 논란까지 다루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게 사실 쉽지는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하던지.

▶유성운〉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언론에서도 그런 분으로 워낙 유명하니까, 정치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제 입에서 감옥이라는 말, 탄핵이라는 단어, 이런 단어 자체를 꺼내기가 굉장히 좀 어려웠는데, 이런 단어를 어떻게 꺼내야 되지? 처음엔 굉장히 고민을 했는데요. 묻기도 전에 본인께서 얘기하다가 ‘제가 탄핵된 뒤에 구치소로 갔잖아요.’ 이렇게 굉장히 편하게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뭐랄까, 그런 거에 별로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되게 쭉 말씀을 해서, 일단 물어보는 것도 좀 편했고요.

또 회고록 시작됐을 때 초반에 그런 얘기를 좀 했었어요. 옛날에 올리버 크롬웰이라고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있는데요. 지도자가 말년에 초상화를 화가한테 맡겨서 그렸는데 크롬웰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화가가 크롬웰한테 ‘이 사마귀를 지울까요?’라고 물어봤는데 크롬웰이 ‘지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그려 달라’고 해서 그 사마귀가 초상화에 남아 있어요. 영국에서는 그 그림이 굉장히 유명하고, 또 가치도 높게 평가받아요. 박 대통령한테도 초반에 “이 회고록이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처럼 돼야 더 가치가 남을 거다”라고 했고, 박 전 대통령도 흔쾌히 그런 거에 동의했고, 그 이전 대통령들의 회고록과는 차별화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공적 못지않게 자기의 어떤 과오에 대해서 많이 담겨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고 그런 말씀을 했어요.

올리버 크롬웰(1599~1658) 초상화. 화가 사무엘 쿠퍼의 1656년작. 입술 아래 사마귀가 뚜렷하다. 요즘으로 치면 '포토샵'이 성행하던 시절, 크롬웰은 쿠퍼에게 '사마귀와 모든 걸' 숨김없이 그리라고 요청했다.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올리버 크롬웰(1599~1658) 초상화. 화가 사무엘 쿠퍼의 1656년작. 입술 아래 사마귀가 뚜렷하다. 요즘으로 치면 '포토샵'이 성행하던 시절, 크롬웰은 쿠퍼에게 '사마귀와 모든 걸' 숨김없이 그리라고 요청했다.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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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측근은 최태민 아니라 그의 아내 

▷이경희〉 회고록을 보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동생 박지만 EG 회장이랑 가족을 만나지 않았고, 심지어 구치소에 가서도 면회도 안 했다고 되어 있어요. 물론 이유는 좀 다릅니다만, 그렇게까지 가족을 쳐낼 정도로 깔끔하게 주변을 관리하고 원래 좀 선을 잘 긋는 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국정농단에까지 이르렀을까 의아해지는 면이 좀 있어요.

▶유성운〉 그렇죠. 가족을 쳐낸 것이 참 복합적인데요. ‘왜 그렇게까지 하셨냐’고 물어봤더니, 하나는 ‘동생을 보호하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막 비정하게 쳐낸 것보다 동생이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고 또 불우한 그런 과정도 있었고, 근데 만약에 자기가 대통령이 돼서 대통령의 동생이다. 또 혈육이다 하면 온갖 사람들이 다 꼬여들 텐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동생을 망치는 길이 될 거다. 결국 그렇게 확신을 했고 그래서 동생을 보호하려면 아예 ‘권력과는 무관한 사람이다’라는 걸 확실하게 인식시켜야 동생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역시 친인척들이 개입하는 것 자체는 좀 문제니까 그 싹을 잘라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게 참 역설적인 문제인데 가족을 그렇게 거리를 두니까, 하지만 그 누군가는 곁에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 작은 틈을 최순실씨, 이제는 최서원씨로 개명했지만, 끼어든 거죠. 왜 그러면 ‘최서원씨는 그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었을까’ 물어보면 박 전 대통령 이야기는 (회고록을) 읽어보셨겠지만 일단 여자로서 사야 되는 물건들이라든지 여러 가지 남들에게 말하기 좀 어려운 그런 물건들을 사야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본인은 그거를 청와대 비서관들한테 맡기기도, 본인 경호원들이라든지 시키기가 좀 굉장히 민망하고 미안했다는 거죠.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청와대에서 나왔을 때 최서원씨 집안이 굉장히 뒷바라지를 좀 해줬다고 해요. 보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두 동생과 셋이 사는데, 최태민 목사의 부인 임선이 여사가 김치도 해다 보내고 옷 같은 것도 보내고 정말 친어머니처럼 많이 챙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집안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좀 남달랐고 그런 부분이 작용을 한 것 같아요. 아울러 말하면 예전에 ‘최태민 목사랑 박근혜 전 대통령이랑 뭔가 이상한 관계다’ 그런 얘기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건 아니었겠다’라는 확신을 가진 게 최태민 목사랑 그런 관계였다면 그 부인인 임선이 여사가 그렇게 챙겼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제 느낌에는, 만약에 두 사람이 이상한 관계라면 몰랐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근데 나중에 보면 임선이 여사 칠순인가 팔순 잔치에도 가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노래도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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