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대신 그림' 기부" … 미술품으로 좋은 일 하자" 공감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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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예가 손경식(73)씨는 이달초 노인 컨설팅 단체인 '아름다운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그림 20점을 기부했다. 허백련.김은호.서세옥 등 한국의 근현대 동양화가의 작품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취미로 모은 한국화 170여 점의 일부다. 작품당 100만~200만원 안팎에 구입했으니 기증액으로 치면 2000만원이 넘는다. 손씨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갖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그림이 팔려 노인들을 위해 쓰이는 게 더욱 의미있다"고 말했다.

미술품의 자선단체 기부는 우리에겐 아직까지 낯선 문화다. 그림 구매를 돈 있는 사람의 사치쯤으로 여기는 분위기 탓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매.아트페어 등을 통해 미술시장이 활기를 찾으면서 돈 대신 그림으로 좋은 일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서울옥션은 12월 12일 '화이트 세일'이라는 자선경매 행사를 연다. 콜렉터.화가 등이 기증한 작품을 경매해 전액을 '아이들과 미래'(이사장 송자)에 기부한다. 아이들과 미래는 이 돈을 소외 지역의 어린이들이 문화생활을 경험하는 데 쓸 예정이다.

이번 경매에는 48명의 명사가 55점의 그림을 내놓았다. 이왈종의 '제주생활의 중도'(황영기 우리은행장), 김중만의 꽃사진(오세훈 서울시장), 오치균의 '무제'(배동만 제일기획 사장), 남관의 '추상'(문양권 바른손 대표) 등이다. 추정가는 300만원부터 4000만원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행사에서는 모두 100만원부터 경매를 시작한다. 윤철규 서울옥션 대표는 "미술 콜렉터는 돈이 많아 그림을 산다기보다는 그림이 너무 좋아 구매를 하는 분들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기증하는 것은 돈을 기부하는 것만큼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미술품을 기증하면 세금 혜택을 받게되는 법안 제정을 국회가 추진 중인 상황에서 '그림 자선경매'는 또 하나의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그림을 기증해도 기증자에게 세금혜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자선경매의 경우 경매에서 팔린 금액만큼 기증자는 소득공제의 혜택을 받는다. 판매액을 직접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경희대 최병식 교수는 "영국은 미술관이나 자선단체에 미술품을 기부할 경우 감정가의 120%로 가격을 평가해 세금을 최대한 공제해준다"며 "그림을 기증하는 사람이 존경받고 세금우대도 받을 수 있도록 기증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황영기 우리은행장이 자선경매에 기부한 이왈종의 ‘제주생활의 중도’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기부 문화도 우리의 경제 수준에 맞춰야죠"
서울옥션에 그림 내놓은
황영기 우리은행장

"골퍼의 멋진 스윙 모습이 담겨있는 밝은 느낌의 그림입니다. 그림 속 유유자적 하는 목가적 삶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황영기(55) 우리은행장은 이왈종의 '제주생활의 중도'라는 그림을 맛깔나게 설명했다. 그는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이 그림을 이번 서울옥션 자선경매에 기부했다. 추정가는 500만~800만원이다. 황 행장은 "농담 같지만, 저 그림을 갖게 된 후로 골프 스코어가 다섯 점은 줄었어요. 그림 가운데를 보세요. 골퍼의 스윙폼이 골프를 제대로 아는 화가가 그린 것 같지 않습니까."

황 행장은 미술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갖고 있다. 아내와 함께 전시회도 다닌다. 그래도 콜렉터라고 부르면 손사래를 친다. "주로 아내가 좋아하지요. 한번은 아내가 유럽 성지순례 갔다가 130년 된 그림을 한 점 사왔어요. 닭과 농부를 그린 그림인데, 옛 그림 중 닭을 그린 것은 찾기 쉽지 않다고 뿌듯해하더군요. 가격 보다는 마음에 드는 그림이 우선이지요."

각별한 애정을 느낀 그림을 기부하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서 기부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부 문화도 우리 경제 수준과 비례해 가지 않을까요. 그림을 기증하는 문화는 그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박지영 기자<naza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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