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헬싱키서 러시아 - EU 정상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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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에너지 강국으로 떠오른 러시아가 국제 질서의 전통적 중심축인 유럽과 힘 대결을 펼치고 있다. 24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러-유럽연합(EU) 정상회의는 통상.에너지 협상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보이고 있는 양측의 격전장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25개 EU 회원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일 이번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날 경우 1994년 체결돼 내년 말까지 유효한 러-EU 간 포괄적 협력협정이 연장 조인되지만, 협정 서명이 수월하진 않을 전망이다. 통상.에너지. 인권 문제 등 주요 의제를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고압적 자세를 취하고, 유럽은 러시아 내의 인권 유린 문제 등을 내세워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세력 균형은 유럽 최대 에너지 공급국의 지위를 지닌 러시아 쪽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 통상 갈등=가장 큰 문제는 통상 분야에서 불거져 나왔다. 정상회의에 앞서 폴란드가 지난해부터 자국산 육류와 식료품에 대한 러시아의 금수 조치가 철회되지 않을 경우 러-EU 정상회의를 보이콧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폴란드는 러시아가 EU 회원국 간 분열을 조장하고 반(反)러시아 성향을 보이는 옛 소련 위성국인 동유럽 국가들을 소외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한술 더 떠 내년부터 EU 25개 회원국 전체의 육류 제품에 대해 금수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을 EU 집행부에 통고했다. 러시아가 유럽산 육류에 대한 전면 금수 조치를 취할 경우 유럽은 연간 20억 달러 이상의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내년부터 새로운 EU 회원국이 되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검역 수준이 열악한 점을 들어 금수 조치 가능성을 밝혔지만, 유럽의 기를 꺾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관측이다. 푸틴 대통령은 22일 "일부 유럽국가가 러-EU 관계를 진부한 '적 아니면 동지' 모델에 짜맞추려 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 에너지 갈등=정상회의는 러시아의 대유럽 에너지 공급 문제도 주요 의제로 다룬다. EU는 91년 채택된 에너지 분야 국제 협력 시스템인 '에너지 헌장'을 러시아가 비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는 헌장에 서명은 했으나 아직 비준을 미루고 있다. 올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가스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대유럽 가스 공급을 중단하는 바람에 큰 혼란을 겪은 유럽은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보장해 줄 헌장 비준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피터 맨덜슨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21일 "에너지 자원이 지정학적 무기로 활용돼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세르게이 야스트르젬스키 러 대통령 보좌관은 22일 "자국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외국의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하는 에너지 헌장을 비준할 경우 러시아는 공급망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 인권 문제=유럽은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인권 문제를 협상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발생한 반정부 성향의 여기자 피살 사건 등 러시아의 자유 언론 탄압과 러시아군의 체첸 내 인권 유린 문제 등을 집중 거론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근거 없는 비난으로 내정 간섭"이라며 버티고 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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