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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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여름, 쏟아 붓 듯 내리쬐는 햇볕을 대나무 틈 사이로 갈기갈기 찢어주고 후텁지근한 바람을 대나무의 냉기가 시원하게 걸러준다.
그뿐이랴, 안에서는 밖이 보여 좋고 밖에서는 안이 안 보여 좋은 비밀스런 공간.
그래서 꼬깃꼬깃 껴입은 한복을 다소 풀어 젖힌 채 편안한 자세로 오수를 즐길 수 있어 좋다.
발-.
앞마을 냇가의 수양버들이 농사일에 지친 몸을 달래주는 자연의 그늘이라면 대청마루 앞에 드리워진 발은 집안 일에 지친 몸을 식혀주는 또 다른 맛의 그늘이다.
쌀쌀한 대청마루의 냉기를 피부로 느끼며 발 밑 그늘 아래에 누워 부채질이라도 하려고 하면 어느새 「쌕쌕」숨소리가 가빠지고 몸이 녹아 내린다.
발이 쳐진 마루에 앉아 발을 통해 내다보는 앞마당의 풍경은 기교를 부린 영상처럼 운치가 있다.
그 때문에 우리의 발 위에는 요란한 무늬가 없다. 산수도, 용 학도 없고 있다고 해봐야 쌍희자 한 둘이 고작이다.
발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막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리라.
색색가지 물들인 천으로 눈부신 아침햇살과 겨울의 한풍 만을 막아주는 서양의 커튼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기능과 멋을 지니고 있다.
발에도 「법도」가 있다.
문 안 쪽에 쳐야하고 걷어올릴 때에도 반드시 안에서 걷어 올려야 한다. 밖에서는 손댈 수 없다.
이 같은 법도는 발을 단순한 대나무 묶음이 아닌 상징적 의미로까지 격상시켜 놓았다.
「염내」나 「염전」이란 말은 임금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나이 어린 임금 뒤에 쳐진 발 속에 대왕대비마마가 들어앉아 백관대신들을 호령하는 모습은 TV 사극 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발의 용도는 무척이나 폭넓다.
흔히 말하는 여름철 납량용 발을 비롯해 가마 문에도, 물고기와 해초를 건조시키는데도, 고기를 잡는데도 조금씩 이름을 달리하며 갈대·싸리나무·삼대 등으로 만든 발들이 쓰였다.
좋은 발을 하나 제대로 정성껏 만드는데 드는 시간은 60여일.
2㎜간격으로 2천6백 개의 대나무 껍질과 2백60가닥의 명주실을 하나하나 엮어 나가야 한다.
한국의 멋이 물씬 넘치는 우리의 발을 놔두고 커튼장수를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요즘의 여인네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이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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