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장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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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90년 상반기의 연극은 창작극의 완전한 패배로 특징지어지면서 끝났다. 더욱이 그 패배가 한층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번역극이 그 어느 해보다도 질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극을 확립해야한다는 지한 요청과 기대 속에서 출발한 90년대는 그 초반부터 창작극 발전의 기반을 다지지 못한 채 무대를 외국 극들에 넘겨주고 말았다.
통계를 볼 때 금년 상반기의 연극공연은 예년과 별 차이 없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어느 극장이나 객석은 텅 비어있는 것이 예사였다. 이 관객 불황은 대체로 예외가 없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한 명의 관객도 없어 공연을 못한 사대까지 발생했다. 편 당 제작비가 평균 천만원이 넘는 압박 속에서 극단은 이체 생존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연극이 관객에게 어필하는 힘이 약화될 때 번역극공연의 수가 대폭 증가하는 것은 통례였다. 그러나 금년은 통계적으로 볼 때 창작극 공연이 번역극에 비해 월등히 적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질적인 비교는 상대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낙차가 커졌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금년 창작 초연으로 문제가 될만한 작품은 오내석의 『운상각』, 이만희의『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등 3 ∼ 4 편에 불과해 재 공연까지 합쳐도 4∼5편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번역극은 초연만도 데이비드 헨리 황의『M나비』, 가르시아 로르카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다리오포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 하이너 뮐러의『청부』,바츨라브 하벨의『청중』,브레히트의『사천의 착한 여자』, 마틴 발저의『실내전』등 기라성 같은 세계적인 작품들이 선보였고, 거기에다 소련 말리극장의 『벚꽃동산』까지 내한하여 성찬을 베물고 갔다. 7월에는 소련의 대표적인 실험극단인 유고 자파드의 『햄릿』이 공연되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창작극·번역극을 마치 한국연극의 다른 두개의 장르인 듯이 생각하고 쓰고있다. 그것은 연극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일상의 용품이나 관습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2분 법이 적용되고 있다.
국악 양악, 한국화 서양학, 한국 춤 서양 춤, 한복 양복, 한옥 양옥 등 그만큼 외래 문화의 파급이 철저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문화예술양식은 그 나라 국민이 창조하고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것을 뜻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연극은 당연히 한국인이 쓴 희곡을 한국인이 공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번역극과 구별해서 창작극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영국인에게는 창작극이라는 단어나 표현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의식 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한국 연극의 발전은 번역극이 아닌 소위 창작극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2분 법적 사고방식이나 의식을 수정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과제다.
올해의 수많은 우수한 외국희곡의 공연을 보면서 그만 못한『운상각』이나『그것은 목탁…』를 접하면서 받은 감동이나 감흥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속에 내가, 내 살아있는 삶과 문화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적다는 것은 좋은「한국연극」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을 먼저 반성해야 될 것이다. <연극평론가·한림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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