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욕에 눈먼 「엄청난 짓」(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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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아니,재은이가 아닐거예요. 재은이는 잘 있다고 했어요.』
여성 본능의 모성마저 저버린 범행앞에 모성은 할말을 잃었다.
30일 오후3시 서울 강동경찰서장실.
딸이 시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어머니 김수정씨(36)는 믿지않았다. 아니,믿지 않으려 했다.
분홍티셔츠에 노란 쫄쫄이바지와 빨간 운동화.
25일아침 집에서 2백여m떨어진 유치원 갈 준비를 하며 거울앞에 서서 『엄마,나 이뻐』하던 재은이의 목소리를 엄마는 쉽게 지울수 없었다.
매일 점심때면 돌아와 엄마품에 달려들던 1남1녀의 막내 재은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딸이었다.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유치원측의 설명에 엿샛동안 한시도 전화통을 떠나지 않았던 김씨.
간간이 걸려온 협박전화에도 김씨는 『재은이가 잘있다』는 범인의 말 한마디에 매달려 『고맙다』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범인의 돈요구에 딸을 찾는다는 희망으로 급히 3천만원을 끌어모아 선뜻 몸값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김씨의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재은이는 숙대구내 으슥한 구석에서 시체로 돌아왔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과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친구가 얄미웠다』 『일을 크게 저질러 그 친구에게 충격을 주고싶고 구한 돈으로 애인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올림픽아파트는 다 잘 사는 사람이라서 아무나 골라잡은게 재은이었다.』
경찰에 붙잡힌 뒤 횡설수설하는 범인 홍순영씨(23)가 털어놓은 어처구니없는 범행동기.
친구들 사이에 돈잘쓰고 옷잘입는 우아한 여성으로 비치고자 했던 홍씨는 대학을 졸업한뒤 올해 모방송국에 입사했다고 속이기도 했다.
홍씨가 빠져나오지 못한 이 허위의 늪은 결국 겁에질려 우는 재은이의 입을 틀어막고 가려린 목을 졸랐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는듯 재은이 집에 전화를 걸어 돈을 요구했고 심지어 범행뒤에도 태연하게 남자친구를 만나 보랏빛 미래를 함께 설계하기도 했다.
찰나를 좇는 23세 처녀의 허욕과 허영은 한 가정에 치유될 수 없는 불치의 상처와 함께 이 시대가 앓는 도덕상실의 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 드리워지는 어두움을 쉽게 떨치기 어려웠다.<김남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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