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측 논리를 박함(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사과」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논란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과연 일본이 진정으로 지난날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죄의 뜻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왜 많은 한국국민들이 불과 몇마디에 지나지 않을 일왕의 사과발언 수준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단순히 감정문제인가. 그렇지는 않다. 감정문제를 따지자면 설사 일왕이 현재 한국정부가 요구하는 수준이상의 발언을 한다하더라도 그 응어리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감정의 응어리마저 풀리려면 어쩔수 없이 좀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일왕의 사과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를 확정짓기 위한 것이다. 또 그러한 확정된 인식과 평가가 전제되어야 불행했던 과거의 연장선에 있는 한일간의 각종 현안들도 정의롭고 사리에 맞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일왕의 사과가 「일왕은 국정에 관한 권한을 갖지 않는다」는 전후헌법규정에 위배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묻고 싶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전전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 관한 것이지 전후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이상 일왕의 사과발언은 역사적 행위가 될지언정 현실정치적 행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또 일본측은 일왕은 현재 통치권이 없는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이라는 점을 들어 사과를 회피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범죄가 저질러졌던 지난날에는 분명히 모든 권한과 책임이 일왕에게 있었음을 알고 있으며 현재도 「국민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에 더욱 더 사과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측에선 이미 히로히토일왕의 「유감」 표명이 있었고 역대 총리가 여러차례 사과의 뜻을 표명했는 데도 왜 한국은 자꾸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그런 의사표시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뒤는 어떠했는가. 말을 행동에 옮긴 것도 없거니와 그 겉치레의 말조차 번번이 뒤집어 버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나카소네 전총리가 전두환 전대통령 방일때 한 자신의 발언이 그 여운도 채 가시기 전에 신사를 공식 참배해 한국국민뿐 아니라 세계 각국 국민의 분노를 자아낸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없이 일본의 상징일 일왕으로부터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발언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일본인들은 한일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오늘과 내일을 위해 새 출발하자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우리들이 일왕의 사과를 요구하고 일부 일본인들의 몰역사적 인식을 개탄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지난날이 올바르게 청산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일본은 말로는 사죄를 한다고 하면서도 과거를 청산하는 필수적인 작업인 식민시대 범죄사실의 공표와 2세 국민을 위한 바른 역사기술도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바이츠제커 서독대통령이 사과연설에서 말한 대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도 장님이 된다」는 점을 일본도 되새겨 봐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