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문인, 김삿갓을 기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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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是是非非詩(시시비비시)
年年年去無窮去(년년년거무궁거) 日日日來不盡來(일일일래부진래)
年去月來來又去(년거월래래우거) 天時人事此中催(천시인사차중최)
是是非非非是是(시시비비비시시) 是非非是非非是(시비비시비비시)
是非非是是非非(시비비시시비비) 是是非非是是非(시시비비시시비)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친숙한, 조선후기 시인 김병연(蘭皐 金炳淵 : 1807∼1863)선생의 시입니다. 난데없이 漢詩를 들이미냐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만 옳고 그름에 대한 얘기로 논란이 많은 요즈음 한번 되새겨볼만한 시로 추천해드립니다.

김병연 선생은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들을 비롯, 기이한 행동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홍경래난에 투항한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며 ‘구름을 이불삼고 시 한 수로 밥을 빌며’ 전국을 떠돌다 첩첩산중 강원도 영월에 묻힌 그도 우리 문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괴짜, 아웃사이더 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78년 오늘(10월 22일) 광주 무등산에서 그의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무등산기슭 석곡수원지 호반 양지바른 곳에 세워진 시비는 3층으로 된 흰색 석재기단에 높이 2·5m, 너비1 m, 두께30cm 크기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삿갓모양의 흰색돌을 깎아 씌워 멀리서 보면 이 시비가 삿갓을 쓴 것과 흡사합니다.

왜 무등산에 시비가 세워졌을까? 김삿갓은 1863년 3월 29일 57세로 무등산 동쪽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이 때문인거죠.

시비가 세워질 당시 소설에 뒤이어 방송드라마로, 대중가요로 '김삿갓 붐' 이 일었던 것은 시를 통해 지배계급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야유하려 했던 그의 현실의식이 독재정권에 억눌리던 당시 서민들의 정서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풀이됩니다.

김삿갓과 관련된 일화 한가지. 독재정권으로 오명을 기록했던 전두환 前대통령의 십팔번이 이 『방랑시인 김삿갓』이었다는 것.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금지곡으로 지정된 대중가요를 그의 가장 신실했던 부하 전두환씨가 애창할 때 김삿갓의 풍자와 해학을 잠시라도 음미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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