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스무 시간 투잡해야 생활이 겨우 유지된다니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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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힘들게나마 딸 등록금 마련해 뿌듯

정씨는 "올핸 경기가 좀 다르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경기가 살아난다'는 뉴스를 계속 봐 왔던 터다. 지난해 12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4분기 소비자 동향 조사 결과에서도 소비자심리지수가 107로 6개월 만에 처음으로 100을 넘어섰다. 생활 형편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였다. 그 때문일까. 살을 에는 추위에도 옷깃을 여미고 밤 운전을 나가는 그의 표정에서 여유가 감지됐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월 중순. 마침 정씨에게도 봄소식이 찾아왔다. 힘들게 모은 돈으로 딸의 입학.등록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기뻐 돈 낸 영수증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차가운 밤공기에 지칠 때쯤 영수증을 꺼내보면 새 힘이 솟았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곧 좋아지겠죠. 설마 지난해보다 못하겠습니까."


"재래시장 활성화" 공허한 정부 대책

정씨가 양복점 일을 시작한 건 1982년. 고향인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 올라와 택시운전을 하다 양복점을 운영하는 친구의 형에게 기술을 배워 신촌에 가게를 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 처음엔 장사가 잘됐다. 그러나 곧 벽에 부닥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데모 때문에 가게 문을 열 수조차 없었다. 결국 5년 동안 빚만 잔뜩 안은 채 가게를 접고 광장시장으로 옮겼다. 80년대 후반은 서울 올림픽 즈음이라 재래시장 경기가 한창 좋았다. 하루에 양복 서너 벌을 짓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올봄에는…. 5월 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물급 정치인들이 시장을 헤집고 다녔다. 예년 같으면 그래도 악수하는 상인들이 있었지만 올해는 달랐다. "악수하는 상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시장 활성화 대책을 들고 와도 상인들은 콧방귀만 뀌었죠." 예전 같으면 어버이날.스승의날이 끼어 성수기였겠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6월 정부는 '재래시장 활성화 종합계획'이라는 거창한 방안을 내놓았다. 올 1월 노무현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살리고 성공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점포 선진화, 시설 현대화, 지역상권 활성화 등의 거창한 계획이 나왔다. 이곳의 한 시장 상인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라는 꼴"이라고 혀를 찼다.

여름
"3년 전만 해도 빈 점포 없었는데 … "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장마는 최대의 적이다. 게다가 올 장마는 지난 45년 동안 세 번째로 길었고 강우량도 33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무더위가 막 시작된 7월 말. 가게 창밖으로 장마 후 맑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청계천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이 정씨의 눈에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해 9월 청계천이 복원된 이후 이 지역 유동 인구가 부쩍 많아졌다. 서울시는 청계천 개장 7개월 만에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처음엔 기대가 컸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손님은 그대로인데 오히려 임대료만 비싸졌습니다. 제가 가게를 낼 무렵 50곳이 넘던 양복점이 지금은 15곳으로 줄었어요." 여성복 전문점, 원단 도매점 등 정씨가 입주해 있는 층의 200여 다른 업종 매장에도 빈 점포가 늘고 있었다. 인근 동대문시장 의류쇼핑몰의 김인성(37)씨도 "3년 전만 해도 빈 점포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젠 하나 둘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가을
썰렁한 추석 대목 … "좋은 날 올까요"

정씨는 지난달 새마을금고를 찾았다. 적금을 해약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둘째딸 입학금을 내기 위해 들었던 건데요, 내년에 대학에 가겠다고 하면 어쩌지요." 그는 지금 적금을 깬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추석을 앞둔 데다 올해는 입춘이 두 번 끼어 길(吉)한 '쌍춘년'. 정씨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추석이 코앞에 다가와도, 결혼 시즌에 접어들어도 경기가 나아질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정씨는 "돈 많은 사람이야 결혼을 위해 호텔이나 백화점을 찾겠지만 서민들은 돈이 없어 재래시장조차 찾지 않는 모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정씨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27평짜리 다세대주택이지만, 서울에 자기 집이 있고 양복점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 스무 시간을 꼬박 일해야 겨우 생활이 유지되는데 이게 어디 중산층입니까." 그리고 정씨는 오후 8시쯤 대리운전을 나갔다.

◆ 특별취재팀 : 경제부문=정선구.이현상.심재우.김필규.임미진 기자, 사진부문=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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