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44)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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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계동 열성자대회 다음날 이정윤 아지트에 나가니 이우적은 없고 이정윤 혼자 있었다. 이정윤은 열성자대회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며 『당이 통일·재건되게 되었으니 앞으로 투보는 발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때 이우적이 어젯밤 최익한의 집에서 자고 왔다며 들어왔다. 그는 최익한 그룹이 어제의 열성자대회 결정을 반대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박헌영의 8월 테제를 「우경기회주의」로 보는 한편, 소련군이 진주한 이상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고경흠·최성환·이청원 등을 평양의 소련군 정치부에 파견, 소련군 정치부의 지도아래 서울에 새 당을 조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우적과 최익한은 개인적으로 친했다. 최익한은 원래 강원도 사람이나 경남의 대유학자 면우 곽종석의 수제자였으므로 그의 친구는 경남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한학의 대가이며 상투를 깎고 일본으로 건너가 바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으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가려는 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었다.
그는 외몽고에서 보듯 봉건사회라도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며 소련군의 힘을 빌려 사회주의 혁명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믿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소련군이 데리고 온 카레이스키(조선인)들도 모두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북에서 소련이 날조한 소위 「김일성」과 최익한은 곧 손을 잡게 되었다.
한편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상무위원은 다음과 같았다. ▲총비서 박헌영 ▲정치국 박헌영·이주하·강진·이승엽·권오직 등이었으며 국외에서 투쟁한 화요계의 무정, ML계의 최창익, 그리고 만주에서 이름난 김일성이 서울에 돌아와 재건조선공산당의 노선을 지지하고 입당하면 정치위원으로 보충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에는 돌아오지 않고 평양에서 딴전을 벌였다. 여기에 거명한 김일성은 현재 평양에 있는 자칭 김일성인 김성주를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직국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 김형선 ▲서기국 이주하 허성택 김태준 이귀훈 이순금 강문석 등이다.
중앙 부서를 보면 가장 비중이 큰 정치국 구성에 있어 각파의 반발을 의식하고 균형에 매우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 이에 대해 장안파에서는 불평이 높았다.
그들은 재건된 공산당에 가담했지만 이정윤 한사람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당초 그들은 합작이 아닌 박헌영 계에 흡수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이 재건됨으로써 중앙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의 발간이 결정됐다. 편집위원은 권오직(공청위원장 겸임)·조두원·정태식·이우적·유축운·강병도·정화준 등 7명이며 이중 권오직이 사장, 조두원이 주필, 정태식이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상 3명이 박헌영 직계 주류고 이우적·강병도·정화준이 비주류며 유축운이 중간파였다.
유축운은 비전향으로 해방과 함께 청주예방구금소에서 출옥한 사람이다.
투보가 나오지 않게 되자 나는 매일 심산한테 가 있었다. 거기서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알게되었다. 5, 6년 동안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못하고 현대적 지식도 부족했으나 민족정기만은 뚜렷했다.
그들의 친일파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은 공산주의자 못지 않게 강했다.
그들은 미국도 소련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지배하러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 미국도 소련도 안되고 박헌영도 여운형도 이승만도 결국은 외국의 앞잡이가 될 인물이고 오로지 대한임정의 백범만이 외세에 붙지 않고 우리나라를 독립으로 이끌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십 년 간 장개석에게 크게 신세를 진 백범이 어떻게 장개석에 대해 자주 독립할 수 있을까 나는 의문이었다.
진실로 외국에 대해 자주 독립하려면 외국의 신세를 지지 않고 국내인민대중의 힘으로 독립할 수밖에 없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김창숙이 머물고 있는 전동여관은 마치 임정의 연락소 같았다. 그런데 이때까지 임정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던 김성수-송진우 그룹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가 또한 임정을 추대하고 있었다.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임정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택상 뿐이었다.
장택상은 한때 임정의 구미위원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이며 실질적으로는 아무 역할도 없었다. 국민대회준비위원회는 9월 8일 미군의 인천상륙이후 9월 15, 16일 이틀 간 대회를 개최,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수석총무는 송진우였다. 조선의 부르좌 정당은 일제치하에서는 결성 기도조차도 없었고 해방된 후에도 미군이 진주한 1주일 뒤에야 결성되었다.
식민지아래의 부르좌 정치단체는 대개 진보성과 대중성을 가지는 것이나 우리나라 부르좌 정당은 외군 진주아래 겨우 결성되었으며 그것도 처음부터 진보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반동으로 나타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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