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공포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입시 지옥과 실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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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폭염은 꺾일 줄 모르고, 으스스한 공포물이 저절로 생각나는 철입니다. 듣자 하니, 한국 남자들에게 최고의 악몽은 '군대 다시 가는 꿈'이라고들 하더군요. 아무리 만기 제대했다고 우겨봤자, 행정착오 등등을 이유로 입영통지서가 다시 날아온다는 줄거리죠. 웬만한 한국 남자라면 군대생활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이 악몽의 일차적 인기비결(?)인 듯합니다.

남녀 모두의 보편적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학교도 그 못지않게 인기 있는 공포의 무대입니다. 고3 교실에 다시 앉아 시험범위도 모르는 채 시험지를 받는 악몽, 한번쯤 시달려 보셨을 겁니다.

이 점에서 지난주 개봉한 '디데이'는 꽤 설득력 있는 공포물입니다. 신인 감독의 저예산 HD영화지만 차분한 만듦새가 주목할 만합니다. 여학생 전용 기숙형 재수학원을 무대로, 미칠 듯한 입시의 중압감 때문에 정말로 조금씩 미쳐가는 모습을 점증하는 공포로 그려내지요. 이 학원은 한마디로'친절한 감옥'입니다. 곳곳에 24시간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입시준비 이외의 취미생활.개성표출은 곧바로 응징당합니다. 학원에서 몇 해 전 끔찍한 화재사건이 일어났다는 비밀도 비밀이지만, 강압적인 입시교육 환경이 고스란히 공포의 요소가 됩니다. 특히 우정을 나누던 친구가 경쟁심에 사로잡혀 돌변하는 대목은 공포의 절정입니다. 무섭기만 한 게 아니라 아릿한 슬픔마저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여고괴담'제1편(1998년)의 정서를 제대로 잇는 셈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는 '대학합격≠공포 끝'이라는 에필로그가 따라붙습니다. 입시보다 더한 공포가 있다는 얘기죠.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10일 개봉)는 그 답변 같은 영화입니다. 공포물 아닌 블랙코미디이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올 여름 본 어떤 공포물보다 훨씬 섬뜩했습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중년 가장이 재취업 전선에서 자기보다 돋보일 만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죽이는 얘기입니다. 이 황당한 줄거리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탁월하고 신랄한 은유로 발전하면서 설득력을 얻어갑니다. 속칭 '사오정'들의 살벌한 생존경쟁은 청년 백수의 취업경쟁 저리 가라는 수준으로 그려집니다. 미리 밝힐 수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직장생활을 제법 해본 관객이라면 뒷머리가 쭈뼛해질 정도입니다. 'Z''뮤직박스'같은 정치 스릴러의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이름값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 푼 귀신이 덜 무서워지는 이유가 있군요. 현실이 그보다 몇 배나 무섭고 잔혹한 걸 알게 되니까요. 제대로 된 공포영화를 만들기는 그래서 더 어려운 듯합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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