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36>|전 남노당 지하 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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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리산에는 징용·징병을 피해 오는 청년들이 불어나 그들을 먹이는데 돈이 들었다. 들이 입산할 때는 양식·간장·된장·김치는 물론 미숫가루까지 준비해와도 그것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 때는 이미 경찰이 우리를 겁내 산 속에는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산 속은 해방구와 같았다. 8월9일 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단계집으로 갔다.
오전 1시가지나 집 담을 넘어 안채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골방에 숨어 잤다. 이튿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주재소의 일본 순사 부장이 너를 보자고 찾아왔으니 사랑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젯밤 집에 와서 밥을 새로 지어먹으면서 그 때 밥하는 사람들을 깨웠는데 그 바람에 벌써 소문이 났는가 싶었다. 일본인 주재 소장의 태도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어제 소련이 참전한 것을 아느냐』면서 『어디서, 언제 왔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어제 진주에 와 차가 없어 걸어서 어젯밤 늦게 집에 도착했다』고 대답하자 그 이상은 묻지 않고 『지금 시국이 위급하니 경찰서장의 허가가 있을 때까지는 동네 밖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말하자면 경찰의 연금 통고를 받은 셈이었는데 김찬기와의 관계는 경찰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단 며칠간이나마 합법적으로 마음놓고 집에 머물 수 있었다. 14일 동네 청년들 가운데 첫 징병으로 입영한다고 이 집 저 집에서 술잔치가 벌어지고 주재소에서 15일 산청읍 학교에서 죽창 훈련이 있으니 나도 참석하라는 기별이 왔다. 나는 탈출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8월15일 아침 하늘은 맑았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지마고개를 넘었다.
우리 동네에서 산청읍까지는 자동차 길로 60리쯤 된다. 조금 가다가 나는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행과 떨어졌다. 낮 12시까지 산청 소학교에 모이게 되어 있는데 오후1시까지도 나는 산청읍에 도착하지 않고 길가에 앉아 쉬며 탈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고 있는데 산청읍에서 나오는 사람이 『낮 12시에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을 했다』고 알려주었다.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고 보니 나는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싱겁기도 했다. 사실은 고양이에 불과한 일본을 우리들은 호랑이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분하기도 했다. 우리들에겐 호랑이처럼 굴고 미국과 소련에 대해서는 고양이처럼 움츠러들어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우리들은 36년간 싸워 이기지 못했는데 미국은 4년 동안에 일본을 무조건 굴복시켜 버렸다.
나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일본이 조금 더 버텨 주어 미군이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전투를 하게 되었으면 나는 우리 국토 해방의 전선에 서게 되어 조선은 「해방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인데」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고 입안이 씁쓸했다.
그런데 이날, 45년 8월15일 조선 민족이 얻은 해방은 뜻밖에 미소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 당하는 최악의 해방이었다. 규모는 아직 적다해도 이미 항일 독립 지하 단체를 조직해 놓은 나로서는 기쁘다고 해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출 수도 없었다.
복잡한 기분으로 동네에 돌아왔을 때엔 밤10시가 넘어 있었다. 동네에서는 면서기들이 해방되었다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의 앞잡이로 공출이라고 식량을 약탈하고 징용·징병이란 명목으로 사람 사냥을 서슴지 않던 자들이 자기들이 해방을 쟁취한 것처럼 또 동네주인으로 변신하려고 날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만감이 뭉게 구름처럼 솟아올라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새자 동네 청년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해방의 기쁨을 말하고 내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그러한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 비로소 나는 해방이 되어 좋다는 느낌을 가졌다. 돌이켜 보면 내가 아들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단 한번의 순간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환갑이었다. 백발의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이제 네가 그처럼 바라던 독립이 되었으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같이 살자.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노』 하고 눈물지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중으로 다시 진주에 있는 동지들을 찾아 집을 나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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