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국민 실종돼도···통일부는 직접 만든 매뉴얼도 무시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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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47)씨를 사살한 가운데, 정부가 우리 국민 관련 '돌발사태' 대응 매뉴얼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야당은 “국민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급박한 상황에서 눈치만 보다가 스스로 만든 원칙마저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북한군에게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의 형 이래진씨가 6일 오후 국방부에 정보공개청구서를 접수하기 전 국방부 민원실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윤 변호사(이씨 왼쪽)도 동행했다. 김성룡 기자

북한군에게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의 형 이래진씨가 6일 오후 국방부에 정보공개청구서를 접수하기 전 국방부 민원실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기윤 변호사(이씨 왼쪽)도 동행했다. 김성룡 기자

7일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실이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와 자체 파악한 내용을 종합하면, 통일부엔 ‘북한지역에서의 아국민ㆍ물자 관련 돌발사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이 있다. 2006년 처음 만든 이 매뉴얼은 문재인 정부 취임 이듬해인 2018년 개정됐고, 현재 통일부에서 3급 비밀문서로 분류해 관리 중이다.

조 의원실에 따르면 해당 매뉴얼은 북한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리 국민 관련 돌발 사태를 억류ㆍ사상ㆍ피습ㆍ피격 등의 유형으로 나눈 뒤, 유형에 따른 각 기관의 임무 및 대응 조치 등을 규정하고 있다. 통일부 주도 상황 관리 및 사태 수습을 위해 북한에 송환 요청을 하거나, 대북 메시지를 내고, 관련 사항을 언론에 설명하는 등 진행 단계별로 취해야 하는 행동도 제시돼 있다고 한다.

통일부는 조 의원실에서 “공무원 사살과 관련, 실종ㆍ나포 등에 대한 매뉴얼 및 관련 조치 내역 일체”를 요구하자 “북한 지역에서의 돌발상황 발생 등에 대비하여 위기대응 매뉴얼을 작성,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면서도 매뉴얼에 따른 조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또, 실종자 탐색과 구조, 생사 확인, 송환, 국제 공조 등을 위해 행한 조치와 관련해선 “유관 부처 간 관련 사항을 공유하고 있었고, 9월 23일 16시 35분경 유엔사와 북한군 간 판문점 채널을 통해 북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고만 답했다.

국회에서 질의하고 있는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국회에서 질의하고 있는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 [연합뉴스]

조 의원은 “이번 이씨 실종과 사살, 시신 훼손 등 전 과정에서 해당 매뉴얼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통일부는 강 건너 불 보듯 손을 놓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 의원실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매뉴얼 규정의 피격에 해당하는 돌발 사태임이 분명한데도, 당연히 해야 할 조치들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매뉴얼 존재를 몰랐다면 무능이고, 청와대와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알고도 스스로 만든 매뉴얼을 외면했다면 심각한 직무 유기”라고 부연했다.

한편 조 의원은 해당 매뉴얼뿐 아니라 2018년 처음 수립된 ‘북한 관할 수역 내 민간선박ㆍ인원 나포 시 대응 매뉴얼’의 존재도 확인했다. 조 의원 측이 이를 적용하지 않은 이유에 관해 묻자 통일부는 “이씨가 선박에 타고 있는 상태로 실종된 게 아니라 매뉴얼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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