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복음(金福音) 여사는 한국 간호사에 있어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50년부터 80년까지 30여년동안 간호협회 임원으로 활동한 그는 53년부터 시작된 간호원자격 검정시험제도 폐지운동과 간호고(看護高) 의 전문대 승격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넉넉치 않은 조직을 운영하시느라 늘 노심초사하셨죠. 한번은 신경성 대장으로 아프신데도 출근을 하셔서 후배들이 협회 문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시도록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
64년 간호협회에서 섭외.홍보 간사로 활동했던 고려대 간호학과 김순자(金順子) 명예교수의 회고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성심성의를 다했던 그의 면모는 간호협회 이사회가 열리던 날이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면 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계셨지요. 이사회가 소집되지 않으면 사안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죠. 전화하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나가서 일보라' 고 하신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꼭 성원을 채워 일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
한층 한층 올라갈 때마다 망치로 두드려가며 확인한 뒤 지었다는 서울 중구 쌍림동 간호협회 회관도 간호협회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간호 사고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던 이른바 '김영자 사건' 이 69년 터졌을 때 무죄 판결과 간호원의 주사행위 적법성 확보를 위해 앞장섰던 이도 고인이었다.
김영자씨는 부산진보건소에 근무하던 중 의사가 없을 때 스트렙토마이신을 환자에게 주사했다가 사망,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었다.
당시 고인은 남편인 고 김석목(金錫穆) 전 서울대 교수와 함께 진정서와 탄원서를 작성하고 새벽에는 관리들을 찾아가 설득했으며 청와대 방문과 간호원들의 '주사 거부' 를 이끌어 70년 3월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1909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30년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한 뒤 33년 일본 도쿄 성누가여자전문대로 유학을 떠나 공중보건간호 기본 연수과정을 마쳤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간호사와 부산 야전병원 간호원장으로 일했던 고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75년 국제적십자 위원회가 수여하는 프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을 받았다. 간호학 교원 양성을 위해 54년 보사부에서 만든 중앙간호연수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간호협회에서의 활동 뿐 아니라 개인적 삶도 모범적이었던 그는 "안팎으로 깔끔했던 분" 으로 통했다.
부부간의 정도 돈독한데다 1남 3녀가 모두 서울대에 진학하는 등 가정생활도 충실하게 꾸려 후배들 사이에서는 "결혼 전에 반드시 김복음 선생님 집에 다녀와야 한다" 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임명자(林明子) 간호협회 재정이사는 "강직한 면모만큼이나 자애로운 부분이 많으셨다" 며 "회비 인상과 같은 문제도 선생님의 설득이면 무난하게 넘어갈 정도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고 말했다.
이제 고인은 떠났지만 간호에 대한 사랑과 늘 언행이 일치했던 그의 모습은 그를 아끼던 사람들에게 또다른 '복음' 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