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새해에는 ‘무지의 장막’을 펼치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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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호 31면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어느덧 올해도 끝자락에 걸렸다. 시간의 흐름은 무심하고 가차 없다. 그것을 부여잡지 못해 아쉬워하는 인간의 마음만 속절없을 따름이다. 오늘과 내일이 중함에 차이가 없고 이달과 내 달, 올해와 내년 또한 다를 게 없다.

도덕률을 잃은 정부와 정치권 #언론 전문가도 진영에서 헤매 #한쪽 아닌 사회 위한 합의 필요 #나만 옳다는 생각서 악이 싹 터

그런데도 굳이 하루와 한 달과 한해로 나누어 놓은 건, 버릴 건 버리고 벼릴 건 벼리자는 의미일 터다. 그래서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을, 이달보다 나은 내 달을,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맞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무작정 시간을 보낸다고 나아질 리는 만무하다. 어리석은 젊은이가 시간만 흐른다고 지혜로운 노인이 되지는 않는다. 모난 욕심이 세월을 따라 둥근 자비로 다듬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 없이는 그저 어리석은 늙은이로 몸과 마음만 낡을 뿐이며, 깨지고 쪼개져 더욱 거친 탐욕이 될 뿐이다.

스스로 나아지려는 노력은 자신을 돌아봄에서 비롯된다. 오늘 그리고 이달, 올해에 내가 어떤 길을 걸었고 걸어왔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칸트가 자신의 묘비명으로까지 가져다 썼던 게 바로 그것이다.

“깊이 반성할수록 경외와 예찬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게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칸트처럼 훌륭한 철학자가 아니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반성을 통해 밤하늘의 별을 세듯 잊혀가는 도덕성을 돌아보는 것이 인간 본성을 되찾는 길인 것이다.

올 한해를 뜨겁게 달궜던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내 마음속의 도덕률을 잊은 탓이었다. 특히나 현 정권이 그랬다. 국정 농단으로 파면당한 정권의 대안으로서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았던 현 정권 아니었나. 그런데도 전 정권보다 나을 게 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실망시켰다. 시작부터 스스로 만든 인사 기준을 흩트려 놓더니, ‘단군 이래 최악의 위선자’로 불리던 인물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장관 자리에 앉혔다. 그런 오만 앞에서 반대하던 국민이 오히려 무색해졌다.

선데이칼럼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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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역시 도덕성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여권은 청와대의 무리수를 맹목적으로 두둔하며 국민을 배신했다. 일 년 내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검찰의 칼끝이 자기 편을 향하자 ‘세상에 이런 나쁜 X이 없다’는 듯 욕을 해대는 몰염치도 선보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다. ‘정의’를 당명으로 쓰고 있는 범여권 정당 역시 눈앞의 이익 앞에서는 정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며 스스로 ‘정의없당’이 됐다.

제1야당은 끝내 잃어버린 도덕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찾으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이 나라의 보수지형을 초토화시켜놓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부끄러움도 몰랐다. 그렇게 스스로 무기력해짐으로써 국민을 배임했다. 정부·여당의 오만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돌렸다. 그나마 양심 있는 몇몇만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던 그레셤이 울고 갈 일이다.

언론 또한 도덕률을 외면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존재 이유를 무시하고 자기 발로 특정한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스스로 망국적 진영 논리를 공고화하는 도구가 됐다.

전문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 핵과 미사일, 원자력 발전, 태양광, 소득 주도 성장 등 각종 영역에서 학문적 소신보다는 밥그릇과 출세가 판단의 기준이 됐다. 정권에 따라 정책이 180도 바뀌어도 누구 하나 자리를 걸고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 없는 공무원들은 원래 ‘영혼 없는 존재’들이니 거론할 가치도 없다.

이런 모든 도덕률 위반이 국민의 이름으로 자행됐다. 결국은 개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으면서 말이다. 이 나라 국민은 그렇게 정부와 정치권, 언론, 전문가 그룹, 공무원들한테 속은 피해자가 됐다. 최소한 국민의 절반은 그렇다. 절반의 수혜자가 있더라도 절반의 피해자가 발생하면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니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생각이 그것이다.

“한 쪽에 큰 이익을 주더라도 다른 쪽에 큰 고통을 준다면 사회의 전체 효용이 증가하더라도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의 도덕률에도 들어맞는 게 아니다. 오늘 같이 진영 간 울타리가 공고한 시대에 잃어버린 도덕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 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어떠한 편견이나 색안경 없이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장치 말이다. 그의 말대로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무지의 장막을 치고 어떤 조건도 없는 평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면 정의의 원칙에 걸맞은 사회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쪽에 유리한 게 아니라, 사회에 이롭고 평등하며 공정한 합의다.

새해에는 정부와 정치권, 언론, 전문가를 비롯한 우리들 모두가 무지의 장막을 펼치고 세상을 보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러시아 출신 미국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노래한 것처럼 “악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 뿌리내린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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