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인쇄업체가 성폭력 키트 공급? 여가부 묘한 수의계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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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가 전국 해바라기센터, 전담 의료기관 등에 공급 중인 ‘성폭력 증거채취 응급 키트’(Rape kit) 조달 과정에서 편법과 특혜 의혹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성폭력 증거 채취 응급 키트란 성폭력 피해자 진료 과정에서 의료진이 피해 증거물을 원활하게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용품이다. 2001년 법무부ㆍ국립과학수사연구소ㆍ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개발했고, 2002년부터 여가부가 배포해 왔다.

성폭력 응급키트.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 캡처]

성폭력 응급키트.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 캡처]

그런데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여가부로부터 최근 3년(2017년~2019년)간 응급 키트 계약 현황을 제출받은 결과, 키트 조달은 의료기기 업체가 아닌 인쇄업체 A사가 전담하고 있었다. A사가 여가부와 계약을 한 건 2016년부터라고 한다.

A사는 2014년 ‘인쇄ㆍ기획ㆍ판촉’을 업종으로 사업등록을 한 터라 의료기기 제작 경험이 없었고, 때문에 여가부와 계약 후 다시 의료기기 제작업체에 재하청을 줘 물품을 공급했다고 한다. 이 경우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A사는 지난 8월에서야 ‘의료기기판매업’을 업종에 추가 등록했다.

여가부는 3년간 10차례 계약을 모두 A사와 체결(총금액 4억 5800만원)했는데, 모두 수의계약으로 진행했다. 2017년 5차례, 2018년 1차례 계약은 아예 공개입찰을 하지도 않고 A사와 체결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국가계약법)에 따르면, 2000만원 이하 계약일 때만 입찰 없이수의계약을 하는 게 가능하지만, 6번 계약 중 2000만원 이하 계약은 1번이다.

2018년 5월부터는 경쟁입찰을 하긴 했지만, 모두 A사만 지원했다. 여가부가 조달청에 낸 ‘입찰에 부치는 사항’을 보면 전자입찰서 접수부터 마감까지 기간이 2~4일간 밖에 안됐다. 조달청 관계자는 “정부ㆍ부처가 적극적으로 입찰을 홍보하지 않고 마감시한을 짧게 두는 경우, 단일 응찰로 유찰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국가계약법에 따르면 단일 응찰은 유찰 사유가 되고, 이 경우 정부·부처는 수의계약을 진행할 수 있다. 즉, 경쟁입찰→단일 응찰→유찰 방식을 거쳐 여가부는 A사와 수의계약을 한 것이다.

이와 관련 23일 열린 국회 여가위의 여가부 국정감사에서 이정옥 여가부 장관은 “공개 입찰을 해도 다른 업체가 지원하지 않아서 그런 거로 안다”면서도 “해당업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살펴보겠다. (자체 감사를)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전희경 의원은 ”의료물품을 인쇄회사가, 그것도 10차례나 수의계약으로 따낸 것은 유착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며 감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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