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해외여행의 대량소비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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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엄청난 물난리에도 불구하고 국제공항 출국장은 연일 대만원이다. 올 여름 휴가철을 맞아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수치는 사상 최대를 기록할 태세다.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처 17년 만에 우리는 연간 해외 관광인구 1000만 명 시대를 열고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빈발하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자연재앙의 연발에 맞서는 국제관광 열풍의 복원력은 전 지구적 수준에서 그저 경탄스럽다. 지난해 해외 관광객의 수는 세계적으로 8억 명을 돌파했고 해당업계의 연간매출도 480조원 규모에 이르렀다. 현재 지구상의 전체 근로자 가운데 약 10%가 관광산업 종사자란다.

오늘날 세계 전역은 관광객들로 연중무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유적지나 명승지 등 이른바 관광명소는 '디즈니랜드'와 다를 바 없게 되었고 지구촌의 오지와 벽지(僻地) 또한 늘어난 외지인의 발길 탓에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관광은 20세기 후반 이후 인류문명의 주요 경향들, 곧 탈산업화와 소비혁명, 정보화와 세계화 등을 한데 아우르는 막강의 키워드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오늘의 세계는 '여행의 시대'다.

워낙 인간에게는 '여행 본능'이란 게 있다. 300만 년의 인류역사 가운데 마지막 1만 년을 빼면 전부 이동인간이요, 유목사회 아니었던가. 게다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 특유의 호기심은 배부르고 등 따스하면 잠만 청할 뿐인 동물에 결코 견줄 바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해외관광의 세계적 확산은 새삼스러운 일이라기보다 '여행자 인간(Man, the Traveler)'이라는 인류의 원형질을 확인하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의 주요 원동력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안전이나 비용.기회 등의 측면에서 나날이 발전해온 단체관광 혹은 패키지 투어다. 한데 문제는 그것의 어두운 그늘이다. 우선 여행의 상품화가 지닌 편익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단체관광 코스는 너무나 볼거리 중심으로 획일화돼 있다. '서유럽 8개국 완전일주'나 '나.폼.소(나폴리.폼페이.소렌토) 포함' 따위의 광고 문구가 말하는 것처럼 여행의 주목적은 짧은 기간 동안 보다 많은 지역을 '주파(走破)'하는 것이다. 단체여행을 통해 현지인과 교감을 쌓거나 현지 문물과 교분을 나누는 일은 애당초 어렵다.

특히 뿌리 깊은 국수(國粹)주의에 더하여 국외여행의 역사가 짧은 우리의 경우는 해외 단체관광조차 너무나 '한국적'이다. 한식에 집착하는 나머지 우리나라 여행자들은 외국의 전통음식을 '공포의 현지식(現地食)'이라 부르기도 한다. 행선지를 많이 챙겨야 여행의 본전을 뽑는다는 생각 때문에 외국인 운전기사나 여행가이드로부터 '빨리 빨리'라는 우리말도 곧잘 듣는다.

더군다나 작금의 해외여행 풍조는 계층적으로 다분히 비대칭적이다.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나라의 국민, 넉넉한 계급과 어려운 층위의 사람이 대등하게 조우하거나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상황은 거의 없다. 강대국과 약소국, 그리고 부자와 빈자는 관광과 여행에서조차 서로 '노는 물'이 다른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진정한 여행은 장소이동에 시간 및 계층이동을 더한 것이다. 낯선 곳에서 다른 역사를 배우고 낯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즘과 같은 해외관광의 대량소비시대는 여행문화의 외화내빈(外華內貧)이 아닐까 한다. '여행자 인간'의 비약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도대체 불안하고 세계 평화 또한 도무지 요원하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교역 혹은 취업을 위한 공간적 이동에 비해 여행이 질적으로 다르고 또 달라야 하는 점은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공감을 넓히는 효과 아니겠는가.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