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2월부터 비핵화 정의 요구”…김혁철 축소보고? 김정은 의도적 무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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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북ㆍ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배경을 놓고 한ㆍ미 외교가에서 ‘축소보고설’과 ‘의도적 무시설’이 등장하고 있다. 두번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측은 실무 협상 초반부터 비핵화의 ‘완성 단계(end state)’를 보여달라고 요구했지만 북한이 회담 당일까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ㆍ미 정부 당국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미국은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를 통해 2월 6일 평양 실무협상 때부터 비핵화 개념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다. 동시에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밝힌 '핵무기, 핵 물질 외에 미사일 프로그램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포함하는 비핵화'를 요구했다. 이를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어했다고 한다.

미국의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와 북한의 김혁철 대미특별대표.[연합뉴스·EPA 자료사진]

미국의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와 북한의 김혁철 대미특별대표.[연합뉴스·EPA 자료사진]

관련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그러나 “김혁철 대미특별대표가 이 부분에 대해 축소보고를 한 것인지, 아니면 김 위원장이 보고를 받고도 의도적으로 답변하지 않은 것인지 하노이 회담이 시작된 당일에도 북측으로부터 답변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비건 대표 등 미국 협상단은 김 위원장이 실무협상 결과에 화가 나서 하노이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김 위원장은 하노이 회담장에 나타났다. 이에 미국 측은 김 위원장이 어느 정도의 답변은 가져왔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회담 둘째날인 지난달 28일 확대 정상회담에서 미측이 만든 문서(합의문 초안)를 받아 든 김 위원장은 당황하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김영철 부위원장 등 북한 측은 그 자리에서 “어쩌자는거냐”며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였다. <중앙일보 3월 18일 10면> 이를 놓고 김 위원장이 사전에 미국 측 입장을 분명하게 보고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해석과, 김 위원장이 이미 실무협상자들을 통해 미국 측에 ‘수용 불가’를 지시했는데 회담장에서 미국 측이 재차 요구하자 불만을 표시했다는 해석이 동시에 나온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지난달 28일 북미 정상의 &#39;하노이 작별&#39; 장면.[연합뉴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지난달 28일 북미 정상의 &#39;하노이 작별&#39; 장면.[연합뉴스]

복수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미측이 제시한 문서(합의문 초안)에는 비핵화 완성 단계가 명시된 포괄적 합의가 상단에 있고, 이를 단계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조치로 영변 핵 시설과 관련한 요구 사항이 하위로 포함돼 있었다. 전후 상황을 종합하면 상단의 포괄적 합의에는 생화학무기까지 포함하는 대량살상무기 전반의 폐기가 적시됐다. 하위의 영변 핵 시설을 놓고도 영변 인근의 우라늄농축시설까지 다 포함하는 총체적 폐기가 담겼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회담에서 미국 측의 이같은 ‘완전한 비핵화’ 개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비핵화 개념에 대해서도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북ㆍ미는 두 번째 사항인 영변 핵 시설에 관한 정의에서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준비가 덜 돼 있다”고 판단했고 회담 결렬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이 영변 플루토늄ㆍ우라늄 농축시설 폐기와 국제사회 검증을 거론한 건 의미 있게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지난 17일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 시설 폐기가 본격 논의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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