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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쓴 냉장고 … 수리 부품이 없다니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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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방에 사는 한 소비자는 사용한 지 7년 된 냉장고가 고장이 나서 애프터서비스를 요청했다. 그러나 제조사는 모터와 일부 부품을 교체해야 하는데 부품이 없어 수리를 못 한다고 한다. 소비자는 수리하면 더 쓸 수 있는 냉장고를 부품 때문에 버려야 할 형편이다. 관련 규정에 따라 소비자는 사업자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

현행 소비자 관련 규정에 의하면 제조사는 냉장고가 고장이 날 것에 대비해 단종(斷種)된 뒤 최소 7년간은 관련 부품을 보유하도록 돼 있다. 부품 보유 기간이다. 이를 어겨 수리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구입가격 기준으로 감가상각한 금액에 10%를 가산해 환급하도록 규정돼 있다.

문제는 감가상각을 하기 위해선 해당 제품의 수명기간인 내용연수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행 소비자 피해 보상 규정에 의하면 내용연수는 옛 법인세법 시행규칙을 적용해 산정한다. 그런데 옛 법인세법 시행규칙에는 냉장고 내용연수를 6년으로 규정하고 있어 앞서 말한 소비자는 보상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옛 법인세법 시행규칙의 내용연수는 기업에서 고정자산 비용을 차감하기 위해 정해 놓은 기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규정을 소비자가 사용하는 내구소비재에 적용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다.

첫째 법인세법 규정상 기간이 비교적 짧다. 소비자 제품과 기업 자산의 수명이 같다고 볼 수 없다. 개인용 컴퓨터와 PC방 등 영업용 컴퓨터, 영업용 택시와 개인승용차의 사용연한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둘째 법인세법 규정이 모호하고 불분명해 가정에서 사용하는 품목에 직접 적용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규정에는 '난방용 또는 냉방용 기기'로 표현돼 있어 이것이 냉장고.에어컨.전기난로 등을 포괄하는 것인지 부정확하다.

셋째 이 규정은 1998년 제정됐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제품 진퇴나 과학.기술 발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 보급률이 가장 높은 휴대전화에 관한 규정이 없다. 이륜 및 삼륜차를 포함해 '자동차'로 규정하고 있어 소비자 피해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품목에 적용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소비자 피해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소비재에 대한 사용연한을 현실성 있게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

내구소비재의 사용연한에 대해선 제품 제조 기업과 소비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기업은 가능하면 사용연한을 짧게 잡아 비용을 줄이고 제품 판매를 촉진하고자 할 것이다. 소비자는 냉장고.장롱.승용차 등 고가 제품은 오래 사용하기를 희망한다.

내구소비재의 사용연한은 소비자가 제품을 구입해 사용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간을 의미한다. 제품이 노후해 사용할 수 없는 물리적 사용기간, 제품이 현대감각에 맞지 않거나 제품의 효율성이 떨어져 교체하게 되는 경제적 사용기간도 고려해야 한다. 이 밖에 현재의 기술 수준이나 산업의 경제적 상황,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는 '지속가능한 소비'나 자원절약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내구소비재 사용연한은 부품 보유 기간과도 다르다. 부품 보유 기간은 제품이 단종된 때로부터 해당 부품을 보유해야 하는 기간이다. 반면 사용연한은 수리하지 못하거나 교환이 불가능한 제품의 감가상각 시 적용되는 기초 기준으로 소비자 피해구제 및 합의 권고 시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승신 한국소비자보호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