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날카로운 첫 커피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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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살며시 입술을 댄 순간 불길처럼 목으로 타들어왔던 그. 놀랍고 당황했지만 부끄러워 얼른 감춰야 했던 첫 만남. 쓰디쓴지 달콤한지 가늠할 겨를도 없이 그저 뜨거움 하나였던 그. 그리고 그해 가을과 겨울, 난 온통 그를 알아가는 신비에 빠져 참 황홀했었다. 혀끝에선 쌉쌀했다가 어금니에선 달큰하고 목에선 한없이 부드러운, 그가 피우는 아련한 향을 뭐라 해야 할지 궁색해서 안타까웠던, 모두 잠든 밤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엎드려 부질없는 고뇌로 신음하던 내 젊은 밤들을 그와 함께했었다.

오래지 않아 그로 인한 불면이었음을 알았지만 그와 마주하기는 늘 낮보다 밤이 편했다. 비라도 내리면 하루 종일 그의 향기가 내 젖은 마음을 위로했고 반나절이라도 그를 못 보면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그에게 중독되었다.

멋진 그를 더욱 빛낼 생각에 결혼할 신부처럼 예쁜 찻잔을 사 모았고 날씬하고 화려한 잔에 담긴 그 모습이 좋던 젊은 날이 지난 지금은 둥글고 편안한 막사발에 그를 담아내기 좋아진다.

어쩌다 여행길 휴게소에서 만나는 그는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로 내 손을 따듯하게 감싸준다. 이제 길거리 자판기에서 아무에게나 손 내미는 그를 보게 되지만 소박한 동전 몇 개에도 따듯함을 건네는 그의 너그러움을 어찌 미워할까.

더러는 세월만큼 허물어진 내 속이 아려 그를 멀리해야 할 때도 그와 마주하기는 변함이 없으니 그저 온기를 나누며 바라보다 그의 열정이 식으면 가만히 돌아서도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좋은 벗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울까. 늘 곁에 있어주며 기쁠 땐 달콤하고 슬플 땐 쌉사하고. 그를 마주한 채 눈시울 붉어져도 창피하지 않고 언제나 말없이 위로가 되는….

그를 알게 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 몇 곱만큼 세월이 더 흐른다 해도 그는 변함없이 향기롭고 따듯하게 나를 위로해 주겠지. 그를 너무 일찍 사랑한 대가로 내가 남들보다 더 빨리 머리에 하얀 서리를 맞고 주름이 패고 이가 빠진다 해도 씹어야 삼켜지는 그 어떤 생명보다 더 오래 내 앞에 놓일 테니.

언제나 난 미명의 새벽부터 그와 만날 준비를 한다. 그처럼 몸과 마음을 영원히 향기롭고 따듯하게 간직하고 싶어서.

김재경(43.자영업.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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