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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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캉(J. Lacan)이 지적한 바 있듯이, 실재(實在. reality)를 추구하는 길은 자신의 인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타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해나가는 과정의 길이자, '가시(可視)의 세계'뿐만 아니라 '불가시(不可視)의 세계' 또한 포착하려는 지난한 과정의 길이다.

김명인의 시집 '바다의 아코디언'에서는 그러한 실재 추구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시인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사와 만물을 대하면서, 이전까지 그가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인의 태도에는 한 개인의 시적 편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순한 변화 이상의 그 무언가가 담겨 있다.

일찍이 김명인은 '동두천'(1979), '머나먼 곳 스와니'(1988), '물 건너는 사람'(1992) 등에서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대상으로 실재를 추구한 바 있다. 그러던 그가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실재를 추구하려는 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푸른 강아지와 놀다'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의 황홀함에만 빠지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영원성을 인식하려는 시의 길을, '바닷가의 장례'(1997)에서는 삶의 고달픔을 죽음의 황홀함으로 넘어서려는 시의 길을, 그리고 '길의 침묵'(1999)에서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진 길의 침묵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려는 시의 길을 걸었다.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시인이 걸으려고 하는 시의 길 또한 '푸른 강아지와 놀다' 이후로 그가 걸었던 시의 길과 관계가 깊다. 특히 그것은 '길의 침묵'에서의 시의 길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길의 침묵'을 노래했던 시인이 나아가려는 새로운 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 글은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로 그 새로운 길에 대한 것이다.

2.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시인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길은 '우연'의 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은 모든 것을 우연의 탓으로 여기거나 우연을 신봉하는 자의 길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현상들 속에 존재하는 필연을 인식하는 길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보이지 않는 필연을 꾸려내는 절대자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시집에서 시인이 걸어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왔던 길과는 분명히 색다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던 '가시의 세계'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포용하는 '불가시의 세계'로 완연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버터플라이'에서 펼쳐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물밑으로 /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라는 매우 절묘한 상상력에서는 '가시의 세계'와 '불가시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실재를 추구하려는 새로운 경지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시집에서 시인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사물들의 면모를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서 펼쳐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시인의 상상력이 포착한 것은 그가 이전에 보았던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사물들은 새삼스럽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들을 지닌 실체로 다가온다. 이것은 시인이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실재의 전부가 아니라 실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실재를 추구하려고 함을 매우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제 시인의 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실재를 이루는 또 다른 부분인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자신의 눈을 돌리고 있다.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시인이 사물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대하게 된 데에는 생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과, 어떻게 해서든지 그러한 인식 태도를 극복해 내려는 시인의 마음가짐이 놓여 있다. 즉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아픔과 슬픔을 극복해 내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은 사물과 세상사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로 드러난다.

그리고 시인의 그러한 태도는 부서짐과 동시에 다시 모이는 '파도'('파도')와, '생이 다다른 절벽' 때문에 더 뻗어 오를 수 없는데도 '허공'에 피어오른 '능소화'의 이미지를 통해('저 능소화')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신뢰의 상실('익사')과 IMF라는 우리 시대의 특수한 상황('실직')으로 인한 삶의 비극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3. 시가 언어문화의 정화라면, 시인은 그 정화를 피워내는 창조자이다. 시인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서도 무수한 고통과 불면의 밤을 보내고, 그러한 시간 속에서 시는 피어난다. 그렇지만 이 시집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여기에서 시인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해석하고, 그 근본적인 속성을 드러나게 하는 발견자이다. 그래서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언어화하려는 간절함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언어화하려는 간절함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간절함은 주로 순간 속에서 영원을 찾으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인이 '바다의 아코디언'이 들려주는 영원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바다의 아코디언')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식으로 순간 속에서 영원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헌신'의 방식이다. 자신의 살이 다 발라졌는데도 접시 위에서 여전히 아가미를 뻐끔거리면서 죽음 뒤를 응시하는 물고기처럼('접시 위 물고기') 시인은 '헌신'을 통해 인간이 순간을 인정하면서도 영원을 찾을 수 있다고 노래한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존재의 역설! 이것이 바로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시인이 발견한 실재 찾기의 길이다.

그러한 실재 찾기의 길은 시인이 시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무 허공'('물푸레 허공'), '나무은행'('나무은행 앞에서'), '붙인다', '부린다'('소금밭에 부리다') 등 시인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언어의 면모들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즉 시인은 보이는 세계의 길 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며,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지닌 본질을 현현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시라는 양식에서 언어가 불멸하고, 그리하여 시가 불멸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최근까지 약 10여년 동안 우리 시단에서는 감성이나 욕망을 노래하고, 생태의 중요성을 노래하고 있는 시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이성이 어느 순간부터 오만 방자해지면서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는 위기감과 관련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영원함'을 지향하고 있다.

김명인의 시는 감성이나 욕망만을 노래하지도 않고, 생태의 중요성만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들을 노래하는 시 못지않게 만물의 영원함을 갈구하고 노래한다.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영원함에 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실재 추구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을 어느 정도로 충분히 살려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기준으로 해서 보자면, 그의 시적 여정 자체는 그 긴장감을 어느 정도 충분히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느 한 길에 머물러 있었던 시인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그가 발견한 길은 다소 위험해 보이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시인은 어떤 점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소홀히 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 관계는 순간과 영원 사이에서도 드러나지만,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라캉에 따르자면, 제대로 된 긴장관계는 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에서보다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인의 시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시들에서는 대체로 순간과 영원 사이의 긴장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영원'이 개인과 사회의 긴장관계를 초월하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시대의 시가 지나치게 조숙하거나 조로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 시대의 시는 제 나이를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시는 의식과 무의식, 개인과 사회, 순간과 영원, 고통과 해탈 사이의 긴장을 충분히 살리면서 실재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전문은 '문예중앙' 2003년 겨울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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