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언어 이질화 골 깊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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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남북한간의 언어 이질화현상이 한자어와 외래어부문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한에서 그들의 사상·체제에 맞춰 만들어 쓰고 있는 한자조어는 한자의 뜻만으로는 도저히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외래어도 남한의 영어발음 표기와 달리 북한은 러시아어 발음에 기초해 외래어를 표기, 일반용어·인명·국명 등에서 많은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문교부산하 국어연구소(소장 이기문)의 전수태 박사와 최호철 연구원이 북한의 『현대 조선말 사전』과 남한의 사전을 비교 연구한 결과 밝혀졌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자어의 경우 북한은 어두에 ㄴ과 ㄹ을 쓰고있다. 이에 따라 남한어의 「여성·나체·양식」등을 북한에서는 「녀성·라체·량식」 등으로 표기한다. 이 이유는 평안도 말을 표준어로 삼는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 군사용어를 문맥 속에 넣어 통사적 용법이 다른 것도 많다.
「모내기전투가 벌어졌다」「원료기지를 꾸미는데 일떠나서자」등이 대표적 예인데 위 두 문장에서 「전투」는 불필요한 낱말이며 「원료기지」는 식량공급터전, 곧 논·밭 등을 뜻하는 단어다.
체제에 맞춘 의미적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 남한에서는 「세포」의 사전적 풀이가 「생물체를 조성하는 기본적 단위」지만 북한에서는 「당원들을 교양하고 그들의 일상조직을 지도하는 기본조직」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또 「삯을 받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인 「일꾼」이 북한에서는 「혁명건설을 위하여 일정한 부문에서 사업하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낱말은 문맥의 흐름에 따라 남쪽에서도 이해가 가지만 한자조어에 있어서는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영예군인」「유보도」「기상수문국」「농호」「직관물」「절가」「영화표지」등 셀 수 없이 많다.
앞에 든 단어의 뜻은 각각 「상이군인」「산책로」「관상대」「농가」「전시물」「명곡」 「극장표」다.
이에 대해 이번 조사를 맡은 전 박사는 『북한이 말 다듬기 사업을 벌여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지만 체제용 한자조어가 오히려 말 다듬기의 성과를 무색케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래어의 경우 북한은 일본이나 일본식외래어는 배격하면서도 러시아식은 적극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ㅍ·ㅌ·ㅋ 표기가 ㅃ·ㄸ·ㄲ으로 쓰여진다.
한편 「고뿌」「딸라」「빠루」「빤쯔」「뺑끼」「뎀뿌라」등 일본식 외래어도 그대로 표준어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식 발음을 따른 데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또 국명·수도명 등의 표기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터키 앙카라」→「토이기 앙까라」, 「이집트 카이로」→「애급 까히라」, 「트리폴리 」→「따라불스」, 「오스트리아 빈」→「오지리 윈」, 「스웨덴」→「스웨리예」, 「체코슬로바키아」→「체스꼬슬로벤스꼬」등 알아보기 힘든 지명표기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외래어를 다듬은 말은 남쪽에서도 참고할 점이 많아 장차 남북공동의 국어순화 작업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설기과자」「눈금판」「향참외」「얼음보숭이」「손기척」 등은 「카스텔라」「다이얼」「멜런」「아이스크림」「노크」 라는 외래어보다는 훨씬 정겹게 들린다는 것.
언어 이질화는 근본적으로 민족의 동질성을 파괴할 가공스런 해악을 지니고 있어 장차의 통일에 대비, 남북한간의 공동국어 순화작업이 시급하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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