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정치와 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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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또다시 화염병과 최루탄의 충돌이 길거리를 어지럽히기 시작한 요즘의 소란을 보면서 우리는 과거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올림픽을 전후해서 자제를 보였던 학생들의 과격한 농성·시위는 올림픽 폐막 직후 정호용 의원 사무실점거사건을 필두로 다시 점화되고있는 느낌이다.
최근 대구에서는 하루동안에 학생들이 검찰청사를 점거하고, 민정당 경북지부, 시경, 미문화원을 연쇄적으로 기습해 돌과 화염병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31일에는 전두환씨 부부 「체포 결사대」를 자칭한 일단의 학생들이 연희동의 전씨 사저에 접근하다가 제지하는 경찰과 맞서 화염병과 「사제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났다. 연이어 3일에는 「학생의 날」을 맞아 대학마다 결성된 「전씨 부부 체포 결사대」가 연희동으로 몰려갈 채비를 차리고 있다.
우리는 우선 그와 같은 시위의 동기가 됐음직한 학생들의 좌절감을 이해는 하되 폭력화하고 있는 그 의사표현 방식은 사태 호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만류하고자 한다.
일제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연원으로 삼고있는 한국학생운동은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4·19의 반 독재투쟁의 승리에 이어 유신독재와 5공화국의 오랜 압제에 대한 민중항거를 선도한 것은 학생운동이었다. 그 결과 어렵게 6·29선언을 쟁취했고, 실로 오랜만에 민선대통령을 탄생시켜 오늘에 이른다.
이와 같은 전통의 무게는 현실 정치에 대한 학생들의 목소리에 담겨져 시위를 통해 표출되는 학생들의 요구에 사회적 비중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학생들의 발언권은 기성사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내용과 방식으로 제시되었을 때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사회의 여론은 학생운동의 방향과 한계를 규정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여론은 학생들의 폭력적 시위 방법에 자제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반독재 투쟁 때와는 여건이 달라졌다. 유신이래 처음으로 민선대통령이 등장하고 참다운 정당정치체제가 제도화 된지 열 달이 채 못된 시점이다.
5공 비리의 척결속도나 이에 임하는 정치권의 철저치 못한 접근태도에 대해 학생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기성사회 쪽에서도 공감하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치권은 각 특위활동과 국정감사 및 앞으로 있을 청문회를 통해 5공과의 단절 및 5공 비리의 척결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작업이 혁명 아닌 개혁인 이상 일도량단식으로 속결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필리핀이나 미얀마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과정에는 많은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그래서 개혁작업은 단시일내의 승패가 아닌 합리적 절차의 과정을 겪도록 되어있다.
이런 상황 인식을 학생들은 기성세대의 개량주의 또는 기회주의로 냉소하고 있는 것도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러 번 좌절된 과거의 체험에 비추어 이것이 더 안정되고 현명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이와 같은 논리에 덧붙여서 우리는 폭력시위의 공방 속에서 인명의 희생이 발생할지도 모르고, 학생들의 폭력이 또 다른 사회불안을 수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폭력시위의 자제를 재삼 당부하는 바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쉽사리 바꿀 수 있는 절대가치는 무엇인가. 학생들이 「결사」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고, 뛰어 내리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의견을 주장할 때 그 의견은 더욱 값지고 설득력을 주는 것이다.
기성정치권도 학생들의 시위재발에 대해 일단의 책임감을 느껴야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번 국정연설에서 『지난 시대의 잘못이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될 수 없다』며 5공 비리와의 단절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그런 의지를 통일된 행동으로 반영하는데 크게 미흡했다. 국정감사장에서 5공 비리를 비호하거나 유야무야로 넘기려한 일부 여당의원과 고위관리가 그대로 있는 한 노대통령이 표명한 「의기」는 설득력을 잃게된다.
87년 여름이래 우리 정치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수구세력에 더 많은 후퇴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과거의 헛된 꿈에 집착하고있는 세력은 명심해야 될 것이다.
야권은 야권대로 여소야대의 선거결과가 지워준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는데 미흡했다. 궁극적으로 집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정당의 존재이유인 이상 각 당 자체의 배타적 당리를 정당활동의 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단계는 야당이 그런 집권경쟁을 펼 상황보다 훨씬 절실하게 개혁이 요청되는 단계임을 명심해야 된다.
그것은 집권경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민주화의 확고한 터전을 마련하는 단계인 것이다. 「야대」라는 통칭의 뜻은 야간의 경쟁보다는 단합된 힘으로 5공 비리의 척결과 5공과의 단절을 주도해 줄 것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국정감사 과정에서 보다 긴밀한 공조체제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5공시대의 나쁜 유산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쇄신하고 민주화의 대도로 새 출발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 잠재하고있는 모든 민주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힘겨운 과업이다. 거기에는 국민의 의사가 바탕을 마련해주고 학생들의 의견도 기여할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체사안의 추진을 맡을 주역은 여야를 망라한 제도 정치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학생들의 자제와 함께 정치인들의 보다 헌신적이고 대국적인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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