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 초연의 현장]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러시아 발레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41)는 신작 초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미리 손을 써놓았다. 초대권을 무더기로 뿌려 박수부대를 3층 발코니의 박스석 사이의 통로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두 달 전 개관한 샹젤리제 극장의 이상야릇한 설계 때문에 생겨난 '비밀 공간'이었다.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공연 도중 진기한 부분이 나오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가까운 박스석에 앉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관객들도 속물 취급을 당한 게 분통이 터진 듯 이에 질세라 야유를 퍼부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31)작곡의 발레음악'봄의 제전'이 피에르 몽퇴(38.사진) 지휘로 첫선을 보인 무대였다. 디아길레프는 드뷔시의 발레음악'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대성공에 행운을 비는 심정으로 이 작품의 초연 1주년 되는 날로 공연 날짜를 잡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그날따라 기온도 29℃. 봄날치고는 유난히 더운 날씨였다. 공연은 오후 8시45분 정각에 시작됐다.

제1부 '레 실피드'에서 쇼팽의 낭만적 선율에 매료된 관객은 '봄의 제전'에서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디아길레프 지지자와 반대파 사이에 몇차례 고성이 오갔고, 객석은 물론 무대 위에서도 오케스트라 연주를 잘 들을 수 없었다.

겁에 질린 무용수들은 무대 옆에 서 있던 안무가 바슬라프 니진스키(33)가 '하나 둘 셋 넷'소리치는 것에 겨우 의지해 리듬을 맞춰 나갔다. 지진이라도 난 듯 극장이 들썩거렸다.

극장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괴성이 난무했다. 손찌검이나 주먹질도 예사였다. "미친 놈 같으니라구. 이걸 음악이라고 작곡하다니…""네가 뭘 안다고 까불어"

카미유 생상(68)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극장을 빠져 나갔고, 라벨.드뷔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봄의 제전'전반부가 끝날 무렵 경찰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잠시 진정 기미를 보이더니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시작되자 누군가가 팔을 흔들어대면서 "의사 좀 불러줘요"라고 외쳤다. 스트라빈스키는 무대 뒤로해서 슬그머니 거리로 빠져나갔다.

공연이 끝나고 만난 몽퇴는 "피아노 리허설 도중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아 조용한 곳으로 도망을 갔다"며"잠시 후 디아길레프가 찾아와 '음악사에 혁명을 일으킬 걸작이니만큼 공연이 끝나면 곧 유명하게 될 것'이라고 달랬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