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저질에로물이 판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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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맷돌』『떡』『합궁』『춘화도』『변강쇠Ⅲ』『매춘』….
올림픽을 전후해 개봉되었거나 상영중인 한국영화 제목들이다. 제목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정도로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포르노에 가까운 짙은 에로장면들을 가득 담고 있다.
요즘 극장가에 이 같은 에로영화들이 판을 치자『표현 자유화가 곧 에로 자유화냐』는 비판이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지난해 8윌 공륜의 시나리오 사전심의가 폐지되고 표현의 자유가 대폭 보강된 이후 영화계에는 이 같은 저질 에로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반면, 영화인들이 지난해까지 경직된 심의제도 아래서 그처럼 소리 높여 갈구했던 사회비판 영화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올 들어 9월말까지 제작된 한국영화 60여 편 가운데 이 같은 에로영화가 20여 편이나 차지하고 있다. 또 현재도 10여편의 에로영화가 계속 제작되고 있다.
『젖은 방아야』『고금소총』『순결파티』『빠걸』『사방지』『요화궁』『요철야사 꿀단지』『후궁별곡』등….
이 같은 영화들은 제목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조를 배경으로 민담에 나타난 성 풍속도를 과장해 허황된 줄거리로 꾸며 낮 뜨거운 섹스장면을 무분별하게 담고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절륜의 성적 능력을 지닌『변강쇠』류의 이색남녀들로 묘사된다.
여배우의 젖가슴이 화면을 메우는 것은 이미 옛날얘기. 이제는 국부까지 그대로 노출될 정도다. 화면은 계속해서 남녀의 갖가지 형태의 성행위와 신음소리로 가득 찬다.
영화내용의 전달에 필요한 섹스장면이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섹스장면을 계속 담기 위해 줄거리를 엮어나간 듯한 분위기다. 감독들의「벗기기 경쟁」은 이제 극에 달한 듯하다.
이 같은 저질 에로영화의 범람은 내용심의의 권한과 책임을 지고있는 공륜의 무책임한 심의도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공륜은 지난해부터 심의를 대폭 완화해 오면서 웬만한 내용은 손질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그러나 지난 5월, 새로 취임한 곽종원 위원장은 『퇴폐·에로만은 철저하게 막겠다』고 밝힌바 있으나 저질 에로영화는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저질 에로영화가 판을 치자 일부 감독들을 비롯한 영화인들 사이에서는『이대로 기다간 큰일나겠다』는 자성론이 대두되고 있다.
이 같은 반성은 특히 요즘 영화인들의 「미국 영화직배 반대」운동과정에서 국민의 비판을 의식해 더욱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인 투쟁위원회는 지난 9월말「국민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에서 『그동안의 한국영화의 잘못된 현실에 대해 진심으로 뼈를 깎는 아픔으로 반성하며 사과 드린다』고 밝혔다.
이들의 투쟁에 동참하고 나선 부산지역 재야 사회단체들도 성명서에서『한국영화의 무국적성과 벗기기 경쟁으로 타락한 현실은 결코 영화정책 때문만이 아니며 영화인들의 나태한 민족정신과 사회의식에 있다』고 지적,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씨는『모처럼 찾은 표현의 자유가 저질 에로영화의 범람으로 멍들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 같은 현실이 개선되지 않으면 국민들은 영화인들의 미국영화반대 호소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한국영화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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