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악의 밤」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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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그리스 신전의 성화가 잠실벌에서 타오르며 지구촌화합의 축제가 이 땅의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대견스런 감격의 차원을 떠나서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더라도 여간 의미심장한 일이 아니다. 분명 그것은 인위의 범주를 초월하는 천기의 적중이요, 우주적 계시의 필연이라고 하겠다.
역사의 초기부터 그리스와 우리, 바꿔 말해서 올림픽체전과 우리와는 서로 만나고 있다. 올림포스산의 신과 불함의 신이 만나고 아폴로 제전이나 디오니소스 제전이 영고나 무천과 만나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저들의 신들이 인간성을 지니듯 우리의 하늘은 곧 사람으로 환치된다.
한마디로 저들과 우리는 신인할 일에 인내천이며 천·지·인이 하나되는 삼재사상에서 서로 공통으로 만난다. 역사적 사연이 이러하고 보면 그리스적 제천의식이 우리의 경천의식과 한양의 물가에서 해후했다는 사실은 결코 범상한 징후가 아니며 그것은 곧 역사적 진운의 합치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올림픽제전의 이 같은 역사성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이번 서울올림피아드의 행사, 특히 문화예술축전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측면이라면 바로 축전자체가 지니는 위와 같은 제의적 성격의 확인이라고 하겠다. 올림픽제전의 본래적 성격이 그러했고 우리의 제천의식이 그러했듯이 하나의 국민적 축제 속에서 성과 속이, 신과 인간이, 제의성과 유희성이 함께 어우러지며 질편한 몰아의 신명판이 펼쳐졌던 것이다.
전통문화의 원형질이랄 수 있는 무속의 무자가 표의하듯 하늘과 땅과 인간이 가무의 법열경을 통해서 하나로 이어지는 한판 접신의 경지가 곧 지난날 축전의 본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간의 우리네 축제 속에는 전자의 속성이 퇴색되어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철저한 인공이 제의적 신성을 배제시키고 만 것이다.
성과 속의 양면성에서 성이 말살되면 남은 것은 속의 속성, 다시 말해서 소비적 유희성 뿐이다.
바로 이 같은 우리네 예술행사의 약점을 인정하는 입장이라면 지난 18일 밤 문공부가 주최하고 국립국악원과 전주이씨 종약원이 주관하여 종묘의 정전에서 펼친 「종묘악의 밤」은 더욱 큰 의의와 상징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현무빛 밤하늘을 이고 육중한 정전 뜰에서 장중한 주악과 근엄한 일무로 치러진 엄숙한 제례행사는 그 위엄성과 신성성으로 하여 저간의 외화적 예술행사의 허점을 심리적으로나마 보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며 더욱이 오늘의 올림픽 축제가 가능했던 근원적 계기로서의 한양천도를 이룩한 조선조 태조를 제사하는 자리이고 보면 이번 서울올림픽에 투사되는 상징성은 한층 깊고 진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잠실벌의 인위적 예술과 종묘 뜰의 종교적 비의가 어우러지며 서울의 하늘아래는 비로소 성속이 용융되는 참다운 인류화합의 제전이 펼쳐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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