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면 견디기 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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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앨리슨 래퍼(왼쪽)가 아들 패리스와 함께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내 도전 정신을 병에 나눠 담아 팔았다면 큰 부자가 됐을 것 같다."

한국에 온 영국의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 앨리슨 래퍼(41)는 시종일관 밝고 당당했다. 양팔이 없고 다리만 몸 끝에 약간 붙어있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밀로의 비너스'에 빗대 '현대의 비너스'라 칭할 만큼 장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24일 기자회견에서도 래퍼는 "나는 장애인으로서의 지금이 행복하다"며 "시련이 오더라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면 견디기 쉽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자신의 경험이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래퍼 역시 비장애인들의 삐딱한 시선을 견디는 게 쉽진 않다고 했다. 그는 "나를 예술가보다 장애인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며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접어준다면 현실이 덜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들 패리스(6)를 임신했을 때도 가장 힘들었던 건 주변의 우려섞인 반응이었다고 했다. 래퍼는 "내 몸 상태는 아주 좋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혀 힘들었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얻은 아들이기 때문인지 래퍼는 "패리스를 잘 키우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고 말할 만큼 강한 모성애를 과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 나온 패리스는 손이 없는 엄마에게 물을 먹여주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등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캠코더로 기자회견장을 찍거나 래퍼의 자서전을 번쩍 들어보이는 천진한 행동으로 참석자들을 웃음도 자아냈다.

23일 방한한 래퍼는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에서 28일 '내 손안의 인생(My Life in My Hands)'(이는 래퍼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이란 주제로 한국과 아시아 각국에서 온 대학생 180명을 대상으로 강연한다. 래퍼는 "한국 젊은이들이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라고 들었다"며 "내 경험이 젊은이들이 미래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래퍼를 초청한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제프리 존스 파주캠프 원장, 워릭 모리스 주한 영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손 지사는 "래퍼는 도전을 통해 희망을 준 대표적 인사로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주고 싶어 초대했다"고 밝혔다. 래퍼는 장애인에게 재활.취업.양육을 돕는 공공 서비스가 동시에 제공되는 영국의 사례를 들면서 손 지사에게 장애인 정책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래퍼의 장애는 바다표범처럼 사지가 없거나 일부분만 몸에 붙어있다고 해 '해표지증'으로 불린다. 태어난 지 6주 만에 버려진 그는 보호시설에서 자랐으며 22세에 결혼했으나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9개월 만에 헤어졌다. 헤덜리 미술학교와 브라이튼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로 성공했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엔 임신 9개월 당시 래퍼의 몸을 조각한 5m 규모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래퍼는 아들과 함께 한국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다음달 1일 출국한다.

김호정 기자<wisehj@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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