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국의 북핵정책 전환을 우려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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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근 6자회담 프로세스가 실종된 배경에는 '선 금융제재 해제'라는 북한의 비타협적인 협상 행태가 있다. 그런데 탈냉전시대에 들어 경제난.체제난 속에서 생존투쟁을 벌이는 북한이 '최대 요구, 최소 양보'의 억지 협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어떻게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느냐가 한.미의 공통과제였다. 이를 위해 한.미는 6자회담 틀 내에서 북핵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관계 정상화.경제지원.평화체제 구축 등을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고 개혁.개방을 유도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은 이런 기본적인 합의에 중대한 변화를 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전매특허인 벼랑 끝 전술을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이 거꾸로 북한에 대해 쓰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불법 금융거래를 북한의 약점으로 보고 이를 집중 공략하려 하고, 대북정책 초점과 우선순위가 체제변환.인권문제.위폐문제로 바뀌고 있다. 북핵 해결은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방법은 재고되어야 한다.

첫째,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압박정책은 자칫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므로 한국과 주변국의 지지.협조를 구하기 어렵고, 소기의 성과도 거두기 힘들다. 특히 한.미 간 대북 공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개성공단 사업 등 한국의 남북 교류협력 사업도 미국의 계속적 지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또한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면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 증가와 핵능력의 증대로 이어져 우리에게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 강화는 남북 간에 비대칭적 군사력 불균형을 확대하고, 역내 국가들의 핵개발 유혹과 민족주의적 대응을 자극할 수도 있다.

둘째, 지난 15년간의 협상 과정을 돌이켜보면 미국의 북핵 방치 내지 압박 조치는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부시 1기 행정부가 북한의 핵합의 위반을 계기로 기본합의문을 파기한 뒤 불완전하게나마 관리되었던 북핵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미국의 봉쇄정책에 대해 북한은 핵무장을 더욱 강화하고 1990년대 식 '고난의 행군'을 반복하면서 그 피해를 주민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미국의 협상외교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북한을 상대로 인내심을 갖고 협상에 임했을 때 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94년 기본합의문, 2005년 6자 공동성명과 같은 성과가 있었다.

오늘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이 다시 기로에 서 있다. 여기서 우리와 미국의 선택은 명백하다고 본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편입시켜 보통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해 미국의 외교적 주도력과 인내심이 더욱 요구된다. 특히 이란.이라크 문제 못지않게 북핵 문제가 시급한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가급적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해결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대북 협상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6자회담 참여자 모두가 한반도의 비핵화를 바라고 있고, 미국의 대북 협상을 지지하고 있다. 국제사회와 시장경제의 외곽에 홀로 남아 있는 북한을 빨리 체제 내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그리고 북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윈-윈 전략이 된다. 북한에 핵포기 이행을 위한 전략적 결단을 촉구하면서, 미국도 북한의 결단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안보통일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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