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변화를 거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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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최초고용계약(CPE) 제도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하자 그간 노동법 개혁을 주도해 온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10일 대국민 연설을 하며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파리 로이터=뉴시스]

노동시장을 개혁하기 위한 프랑스 정부의 새 노동법이 또다시 좌절됐다. 기업이 26세 미만의 직원을 채용했을 경우 첫 2년 동안은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최초고용계약(CPE)이 입법 한 달여 만에 철회된 것이다.

그동안 프랑스 대학생과 노동계는 이 제도가 고용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해 왔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10일 "기회균등법에 포함된 CPE제도를 폐기하고 취업을 못한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조치를 모색하겠다"고 발표했다. 엘리제궁은 성명을 통해 "시라크 대통령이 집권 대중운동연합(UMP) 지도부로부터 의견을 들은 뒤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폐기 제안을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CPE 입안자인 빌팽 총리는 엘리제궁의 발표 뒤 대국민 연설에서 새 노동법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해 부족에 유감을 나타내고 22%에 달하는 청년 실업률을 낮추는 다른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총리직 사임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 학생.노동계 대환영=정부 발표 직후 대학생들과 노동계는 "승리했다"며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마리스 뒤마 노동총동맹(CGT) 위원장은 "CPE 철회는 노동자.대학생.고등학생, 그리고 노조가 힘을 합쳐 일궈낸 성공"이라고 환영했다.

프랑스 정부가 올 1월 의욕적으로 CPE 입법 계획을 발표하자 학생들과 노동계는 바로 들고 일어났다. 이 제도를 프랑스가 자랑하는 '평생고용'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법안을 프랑스식 사회복지모델에 일대 수술을 가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이런 분위기 조성이 대학생과 노동자 외에 많은 프랑스인의 동조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여론을 등에 업은 학생과 노동계의 조직적인 저항 앞에 프랑스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2월 7일 20만(경찰 추산) ~ 40만(시위단체 추산) 명의 학생.노동자가 프랑스 전역에서 반대 시위를 처음 벌인 후 시위대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파업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기차.지하철.비행기.버스가 운행을 멈추었다. 우체국과 병원도 파업에 가세했다. 파업과 시위로 인한 경제적 손실도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 프랑스식 복지모델은 철옹성=이번 일로 프랑스 사회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프랑스식 복지모델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무한경쟁보다는 연대를 강조하고, 짧은 노동시간으로 삶의 질을 보장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수준 높은 복지정책은 약자를 사회안전망으로 지켜주고 있다.

문제는 돈이다. 1980년대부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프랑스 정부는 이런 복지정책을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 국가 부채가 국민 한 사람당 1만7200유로(약 2000만원)를 넘어섰고, 91년 이후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 선에 턱걸이할 정도로 저성장이 고착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EU) 25개 회원국 중 스웨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사회보장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이미 손을 대야 할 때가 지났음을 정부뿐 아니라 국민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시민들의 이 같은 이중적인 태도를 놓고 중도 좌파 신문인 르 몽드조차 따갑게 꼬집고 있다. 지난해 연말 여론조사기구인 TNS 소프레스가 프랑스인의 의식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인의 65%가 실업을 걱정하고 영국.덴마크 등 다른 나라의 고성장을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프랑스식 사회모델을 고집한다고 대답했다.

당시 조사를 주관했던 TNS 소프레스의 브리스 텡튀리에 부사장은 "프랑스 사람들은 아직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지적했다. 개혁적인 노동법 철회는 이런 지적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 CPE=프랑스 정부가 최근 입법한 최초고용계약(Contrat Premiere Embauche)을 뜻한다. 근로자가 20인 이상인 업체에서 고용주가 26세 미만의 사원을 채용한 경우 첫 2년 동안은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해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이 법은 기회균등법에 포함돼 지난달 9일 의회를 통과했다. 프랑스 정부는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해 기업들의 채용을 장려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이것이 고용시장 불안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라고 반대하며 노동계와 손잡고 반대시위를 거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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