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 어디로 가나-임재걸<문화부 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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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차 불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전국 1천만 불교신도들은 수심과 한탄에 가득차 있다.
서울봉은사 주지자리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승강이를 벌이던 승려들이 급기야는 심야에 돌파 각목·쇠파이프까지 동원하여 폭력적 사찰 쟁탈전을 벌이고 그 와중에서 신도들까지 부상했다. 이 어찌 청정하여 신도들을 이끌어야할 승려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일수 있겠는가.
승려(비구·범어 bhiksu)란 원래 한 물건도 가진게 없는 (본래무일물)무소유의 삶을 사는 걸사를 말한다.
더구나 이같은 폭력행사에 우리 불교를 이끌어갈 동량으로 교육받고 있는 승가대학의 일부 학인 승려들까지 동원됐다는 사실이야말로 더욱 한탄스럽다. 이들 젊은 승려들은 푸르고 맑은 눈을 가진 정법안장의 젊은 비구들로 신동들의 기대를 모아왔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이들이 집단적·폭력적으로 사찰 쟁탈전에 나선 것은 신도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봉은사에서 벌어진 폭력사태는 조계종 종권을 장악하려는 대립되는 승려들간의 다툼이 그 근저에 깔려있다.
어떤 집단에나 이같은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불교단체는 「자비문중」답게 관용과 화합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야한다는 것이 중생들의 바람이고 승단이라면 또 그렇게 되어야한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에서는 이같은 자비나 관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가 이렇게 된 것은 승려사회에 수도와 중생구제의 높은 정신이 스러지고 명예와 물질을 구하는 나쁜 기운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의 물질만능풍조와도 무관하지 않으나 무엇보다 승단전체가 청정의 기풍을 살리려는 노력에 등한했기 때문이다. 오늘에도 산사에 고승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이들의 힘으로 권도에 물든 일부 승려의 잘못됨을 고치지 못하는게 또한 현실이다.
뜻있는 불교인들은 이같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의 일대혁신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와 같이 소수의 승려가 권위를 휘두를 수 있는 종단행정을 지양할 수 있게끔 종단체제의 전환을 이루고 승려중심이 아닌 사부대중을 위하는 불교가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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