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대통령 'WTO 제소' 강경대응 왜…靑 "안보·통상 분리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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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정책을 놓곤 미국과의 공조를 강조해온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한ㆍ미 통상 분야에선 국익 최우선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미국발 통상 압박에 대해 직접 나서서 WTO(세계무역기구) 제소와 한ㆍ미FTA(자유무역협정) 위반 여부를 검토할 것을 지시한 자체가 이례적이다. 이날 오전 11시께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한국산 철강 규제와 관련해 WTO에 제소할 가능성에 대해 “제소 방침을 결정한 바 없다”는 입장문을 냈다. 그러나 불과 3시간 만에 문 대통령은 ‘WTO 제소 검토’를 공개 거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 보좌관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수석 보좌관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당당하고 결연하게 대응하라”고 주문한 것은 북핵과 통상은 분리 대응하겠다는 기조로 풀이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안보 논리와 통상 논리는 다르고, 서로 달리 궤도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며 “남북 접촉 이후 북ㆍ미 대화 문제가 굴러가고 있더라도 이는 통상과 따로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WTO 제소 검토는 미국의 일방적인 보호무역 조치에 대해 국제 사회와 공동대응하자는 취지”라며 “만약 한국산 철강에 대해 미국 정부가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 대미 철강 수출이 사실상 중단된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안보와 통상의 분리 대응은 우리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수순이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 정부’를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야권과 재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 인상 등을 시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통상 보복 조치에 수세적으로 대응할 경우 ‘일자리 정부’의 기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 청와대는 한국산 철강ㆍ알루미늄 등을 겨냥한 미국의 보복 관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경우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등으로 미국발 통상 압박이 확산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철강에서 전례가 만들어지면 향후 자동차, 반도체 등 주력 업종으로 줄줄이 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에선 미국발 통상 폭풍이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청와대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는 시각도 있다. 백악관이 한국 등 12개국의 철강 제품에 대해 최대 53%의 관세를 부과하는 상무부의 제안을 올해 상반기 중 수용해 시행할 경우 이는 6월 지방선거에도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만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만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일자리 최우선’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통상 충돌은 이미 예견돼 있었다. 지난해 6월 워싱턴에서의 첫 한ㆍ미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자동차나 철강의 무역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국에 중국의 철강 덤핑 수출을 허용하지 말아 달라고 촉구했다”고 공개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해당 물량은 (대미) 수출의 2%에 불과하다는 팩트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방한했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에겐 미국 정부가 한국산 세탁기 등을 겨냥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한 데 대해 ‘이를 풀어달라’고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19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열연공장에서 생산된 열연코일이 출하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상무부가 한국과 중국산 수입 철강제품에 고(高)관세를 부과해야한다는 내용의 무역확장법 232조 검토 보고서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철강협회 및 업계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철강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철강업체들의 대미 수출 규모는 350만톤 규모로 전체 철강 수출량의 12%를 차지한다. 뉴스1

19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열연공장에서 생산된 열연코일이 출하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 상무부가 한국과 중국산 수입 철강제품에 고(高)관세를 부과해야한다는 내용의 무역확장법 232조 검토 보고서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철강협회 및 업계가 깊은 고민에 빠졌다.철강협회 등에 따르면 국내 철강업체들의 대미 수출 규모는 350만톤 규모로 전체 철강 수출량의 12%를 차지한다. 뉴스1

문 대통령은 통상과 안보를 분리하는 지침을 내놨지만 한ㆍ미 간에는 대북 정책을 놓고 긴밀한 공조 관계를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통상 분야에선 힘싸움을 벌여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북한을 겨냥해 '최고의 압박'을 내건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남북 정상회담의 순기능을 설득시켜 나가면서 통상 분야에선 한국의 국익을 관철시켜야 하는 외교와 통상의 이중의 숙제가 떨어졌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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