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진실과 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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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역사와 문학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가령 문학이 인간의 문제, 삶의 현장을 다루는 예술이라면 모든 역사 또한 인간의 문제, 삶의 현장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역사는 언제나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야기」면서도 역사 속의 이야기가 그대로 소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역사 그 자체가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학문적 기능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인데 반해 역사의 문학 소재적 기능은 반드시 예술적 여과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예술적 여과과정이 곧 문학적 상상력이다. 이때 그 상상력은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전제아래 실재하는 역사를 몇 단계쫌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그것이 역사가 지닐 수 없는 문학의 또 다른 기능이기도 하거니와 그와 같은 작업들을 통해 우리는 기술되지 않은 역사,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부분들을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김주영의 『객주』, 그리고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박경리의 『토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일련의 작품들이 거두고 있는 성과는 그 작품들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근접해 있느냐 하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그 작품들 속에 담겨있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작품 당대적 삶의 실상이다.
역사와 문학의 관계가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되는 예를 이른바 「제주도 4·3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민의 한」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금년으로 40주년을 맞으면서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들이 정리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40년 동안 사망자숫자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등 이 사건은 거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 사건은 70년대부터 현기영 현길언 등 몇몇 제주도출신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작품소재로 등장해 왔다. 이들 작품 속에 들어있는 「4·3사건」의 의미가 역사적 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가는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사로서의 정확한 기술에 앞서 문학예술로서의 접근이 시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나름대로의 문학적 성공을 거두면서 이 사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깨웠다는 점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4·3사건」 40주년을 전후하여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이른바 「녹두서평사건」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진실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건은 단행본 『녹두서평』에 수록된 「4·3사건」을 소재로 한 장시 『한라산』의 일부 표현이 문제가 돼 그 필자인 젊은 시인 이산하가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지난 4월4일(3일은 일요일이었다) 1심공판에서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거니와 이 사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문학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려할 때 필연적으로 부닥치게 되는 표현의 한계다. 물론 그것은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 탓이기는 하지만 그 시인이 데뷔가 일천한 젊은 시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문학적 테크닉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문학이 극복해야할 과제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재판부에 제출된 어느 선배시인의 『장시 「한라산」에 관한 감정서』중 다음 대목도 음미해 볼만하다.
『만약 그가 우리 모두가 이해하기 힘든 특별한 구상을 이 시에서 시도한 것이라면 그것을 시정하게 하는 일도 문학의 몫으로 돌릴 때 거기에 이 땅의 표현의 자유가 꽃필 것입니다.』 정규웅<중앙일보출판기획위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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