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관 위에 주유소 '기름 빨대'꽂고 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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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 송유관에 구멍을 뚫은 뒤 그 위에 주유소를 차려 놓고 휘발유 등 50여억원어치를 빼내 팔아 온 절도단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모(37.무직.포항시 대도동)씨와 강모(40.무직.창원시 팔용동)씨 등 4명은 지난해 1월 초 송유관의 기름을 훔치기로 모의했다. 석유 판매업과 유조차 운전 등을 하며 알게 된 이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 송유관을 노렸다. 송유관 기름 절도 사건이 자주 일어난 데다 석유판매업을 한 사람도 있어 수법은 훤하게 알고 있었다. 송유관에 구멍을 뚫은 뒤 주유소를 세워 영업하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씨 등은 송유관이 지나는 노선을 파악하고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경북 경주시 외동읍의 7번 국도변을 범행 장소로 정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밤마다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 이들은 3일 만에 송유관을 발견했다. 이곳을 택한 것은 도로 옆에 송유관이 있는 데다 인근에 주유소가 없어 허가가 쉽게 날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이들은 지하 2m에 묻힌 대한송유관공사의 지름 80㎝짜리 송유관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호스를 꽂는 등 '개업' 준비 작업을 마쳤다. 송유관은 울산시 온산읍에서 경기도 성남으로 G업체의 유류를 수송하는 관로다. 이씨 등은 경주시에 관련 서류를 제출해 주유소 설립허가를 받은 뒤 주유소를 짓고 5월 초 D주유소의 문을 열었다.

이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선모(49)씨 등 4명을 운전기사와 기름 밸브 관리직원 등으로 끌어들였다. 직원 이모(30)씨는 매일 밸브를 조작해 송유관의 휘발유와 경유를 빼낸 뒤 주유소의 지하 저장탱크에 넣었다. 선씨는 12t 유조차를 이용해 부산.김해 등지를 돌며 기름을 팔았다. 경찰은 "두 사람의 월급여가 1000만원씩이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의심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드나드는 차량을 상대로 정상적인 영업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이렇게 빼돌려 판 휘발유와 경유는 모두 438만4000ℓ. 시가 56억원 상당이었다. 송유관공사 측은 매일 많지 않은 양의 기름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도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주유소를 차려 놓고 송유관의 기름을 빼돌린 사건은 처음"이라며 "제보가 없었더라면 검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강씨 등 5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하고, 선씨를 장물운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또 이씨 등 달아난 2명을 쫓고 있다.

경주=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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