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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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성과 미는 생명과 의식처럼 한개의 것이다. 성을 미워하는 것은 미를 미워하는 것이다.』인간의 성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로 추구한 「D· H· 로런스」의 말이다.
그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처음 출판된 것은 1928년이다. 그것도 영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였다.
정작 영국에서 햇빛을 본 것은 60년 베일리법정에서 승소판결을 받고서다. 외설시비가 일어 난지 실로 32년만의 일이다.
예술작품의 「외설」 판정이란 이처럼 칼로 물 베듯 딱 잘라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작품의 외설시비는 심심치않게 있어 왔다. 69년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그 대표적인 예. 결국 이 작품의 외설시비는 법정으로까지 번졌지만, 최종 대법원 판결에서「무죄」가 되었다.
문학작품의 외설 시비보다 더욱 빈번하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영화와 연극이다. 특히 예술성 못지 않게 오락성을 중요시하는 영화의 경우는 이른바 「벗기는 영화」로 적잖은 물의를 빚어온 것도 사실이다. 성개방 풍조와 함께 몰아닥친 포르노성영화다.
포르노(porno)란 말은 그리스어로 「창부」라는 뜻이다. 고대히브리어에도 같은 말이 있는데,「간음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예술작품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한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렸다. 바로 그 「한계」 문제 때문에 이번에는 연극이 외설시비에 휘말렸다.
지난 4일 서울 동숭동 바탕골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매춘』. 이 작품은 동서양의 역사적 사건 속에 있었던 유명한 매춘행위를 들춰내 인간과 사회의 한 단면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공륜의 극본심의에서 개작지시를 받고도 극장측은 예술 작품의「관료적 판단」을 거부, 무대에 그대로 올렸다. 남은 것은 공연법 위반으로 극장이 문을 닫느냐, 아니면 예술창작의 자유를 쟁취하느냐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민주화의 새시대로 진입하는 이 시점에서 「예술」 과 「외설」의 한계를 재는 「새로운 자(척)」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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