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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폭행당한 유학생 김씨가 그냥 맞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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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영국 남부도시 브라이턴의 밤거리에서 지난 15일 한국 유학생 김모씨가 백인에게 술병으로 머리를 맞아 치아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폐쇄회로TV(CCTV)도 없는 거리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범죄는 당시 상황이 담긴 동영상이 페이스북에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영상을 보면서 몸집이 큰 김씨가 왜 반격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그와의 통화에서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지만 쌍방 폭행이 되면 외국인인 나만 추방당할 수 있어 참았다”고 말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외국인의 진입을 달가워하지 않는 영국 분위기에 손해만 볼 것을 우려한 것이다.

김씨는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찍고 있다는 것을 알아 대응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해당 동영상은 인근 술집 앞에 나와 있던 30~40대 영국인이 촬영한 것이다. 충격적인 것은 술집 앞 성인 영국인들이 이들의 충돌을 말리지 않고 오히려 일대일 싸움을 부추겼다는 점이다. 김씨에 따르면 백인 10대들이 “한판 붙자”고 시비를 거는 동안 술집 앞 남성들은 “한번 해보라”며 즐기듯 휴대전화 촬영을 시작했다. 폭행범이 술병으로 김씨의 얼굴을 가격하고 난 뒤에야 “너무 심각하다”며 일부 동영상을 김씨에게 보내줬다고 한다.

영국 동남부 브라이턴에서 유학생 김모씨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백인 청년들로부터 술병으로 얼굴을 가격당해 치아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SNS 캡처]

영국 동남부 브라이턴에서 유학생 김모씨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백인 청년들로부터 술병으로 얼굴을 가격당해 치아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SNS 캡처]

10대 폭행범들은 김씨를 타깃으로 삼기 전 인근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중국인 유학생의 얼굴을 때리고, 이 거리의 일본 식당에서도 행패를 부리며 일본인 사장에게 일부 폭력을 행사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이런 일은 현지 언론에 소개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영국 경찰이 김씨 사건의 용의자들에 대한 제보를 요청하며 공개한 인상착의는 ‘백인 10대 남성, 마르고 갈색 머리에 파란 윗옷과 어두운 코트를 입었으며 회색 바지와 어두운 색깔의 신발을 착용함’ 정도다. 동영상이 없었다면 김씨와 그의 대학 친구인 일본인 여학생이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한 끔찍한 범죄를 영국 사법당국이 조사나 제대로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모든 영국인이 이들 같지는 않다. 현지 주민은 김씨의 치료비 모금 사이트를 개설했다. 소셜미디어의 댓글도 증오 범죄를 규탄하는 내용이 압도적이다. 영국인들이 제보해준 덕분에 김씨가 용의자를 경찰에 알려 한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김씨는 “이번 일을 겪으며 폭행범들 같은 이들은 소수이고, 대다수 영국인에겐 고마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 영국의 인종차별 증오 범죄는 전년 대비 27% 늘었다. 유학생들은 아시아인 비하 발언을 하는 젊은이들을 수시로 마주친다고 증언한다. 서구 사회가 교육 등을 통해 관용과 존중의 전통을 지킬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둔감한 몸집만 남게 될 것이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