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대한민국남편들아] 쇼핑 함께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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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하나도 없어."

없다니. 그게 무슨 줄기세포 같은 말씀인가. 옷장에 가득한 게 다 제 옷인데.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초보 남편이다.

"옷이 많으면 뭐해. 오늘 입고 나갈 산뜻하고 근사한 새 옷이 없는걸." 경력 18년차 남편이라면 이렇게 알아듣고 발딱 일어나 쇼핑 따라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아내 따라 쇼핑 가는 일이 싫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에게 반항하는 나쁜 남편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아내가 시키면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다. 나는 설거지에서 취미를 찾고 걸레질에서 보람을 발견한다. 아내가 시키지 않아도 베란다로 나가 재활용쓰레기를 분리하거나 음식물쓰레기를 내다버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쇼핑 따라가는 것은 정말 싫다.

끌려가는 소의 눈을 하고 끔벅끔벅 아내 따라 집을 나선다. 나는 도살장 같은 백화점에서 10분만 지나면 현기증이 나고 식은땀을 흘린다. 반면 아내는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원기충전 모드로 급속 전환한다. 생기발랄 아내가 여러 매장을 들락거리며 옷을 고르는 동안 지리멸렬 남편은 매장 밖 통로에 서서 '과연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한다. 남자는 지리멸렬하면 누구라도 철학자가 된다.

"어느 게 좋아?"

남편이 철학자가 되거나 말거나 아내는 양손에 각각 옷을 들고 서서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다. 아내가 웃는 얼굴로 남편을 바라볼 때는 쇼핑할 때뿐인지 모른다.

"둘 다 좋아."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그저 귀찮으니까."

그래. 귀찮아! 귀찮아 미치겠어! 귀찮아 하는 거 알면서 대체 왜 나를 끌고 다니는 거야! 나는 백화점이 무너져라 소리치고 싶지만 가까스로 참는다. 그리고 아내를 향해 힘껏 웃어준다.

"귀찮긴. 뭘 입어도 예쁘니까 그렇지."

"거짓말."

들고 있던 옷을 돌려주고 매장을 나온 아내는 몇 군데 더 돌아다닌다. 백화점에 있는 옷은 모두 아내 때문에 디자인이 안 좋거나 가격이 비싼 옷이 되고 만다. 아내는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나도 입어보지 않고 몸에 대보기만 한다. 어서 이 쇼핑이 끝나기만 바라는 내가 제발 한번 입어보라고 하품의 눈물로 호소하면 그제야 입어본다. 조금 작은 듯한 옷을 입고 탈의실에서 나온 아내는 역시 수줍게 웃는다.

"나 너무 살쪘지? 이런 옷 입기엔 너무 늙었지?"

이럴 때 정직은 최악의 정책이다. "아냐, 잘 어울려. 살은 무슨 살. 아가씨 같은데, 뭐."

내 호들갑에도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탈의실로 들어간다. 반나절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아내는 자신의 옷을 하나도 사지 못했다.

산 것이라고는 아이들 옷과 내 옷뿐이다. 그런데도 백화점을 나서는 아내의 기분은 좋아보인다. 다음주면 다시 옷장 앞에서 "옷이 하나도 없어"라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지만.

"아내가 싫어하지 않는 한 쇼핑은 함께 가도록 하라. 오랜 시간 까다롭게 물건을 고르더라도 계속 웃어주고 설령 무거운 물건이 아니더라도 들어줘라. 아내에게 남편과의 쇼핑은 물건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다." -

'대한민국 유부남 헌장'중에서

김상득 듀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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