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처럼 비참하게 추락한 보수 야당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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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자유한국당이 어제 전당대회를 열어 홍준표 전 대선후보를 신임 대표로 선출했다. 홍 대표의 등장으로 의석 107석 거대 정당의 지도부 공백은 이정현 전 대표가 사퇴한 뒤 6개월 만에 메워졌다. 그사이 새누리당 간판이 내려지고 당은 쪼개졌으며 보수 정권의 몰락이 이어졌다. 어떤 정당도 이처럼 비참하게 권력을 내주고 폐족처럼 흩어진 적이 없었다. 과거 같으면 내부 소장파들이 정풍운동이라도 벌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조짐조차 없다.

품격 낮추는 홍준표식 언행 이젠 안돼 #‘협조할 건 협조’ 대여 자세는 바람직 #혁신 보수의 가치 발견할 토론 벌여야

홍준표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해방 이후 이 땅을 건국하고, 산업화하고, 문민정부를 세운 당이 이렇게 몰락한 것은 자만심 때문이다. 당을 혁신해 국민의 신뢰를 받을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하지만 홍 대표가 맞이한 정치적 상황은 보수 역사상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내 2당인 한국당의 최근 지지율은 7%로, 원내 4당인 바른정당의 9%보다 낮은 수치가 나올 정도다(한국갤럽, 6월 27~28일 조사).

이런 끝 모를 추락 과정에는 그동안 인성(人性) 문제까지 거론될 만큼 기이한 행태를 보인 홍 대표에게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그는 경쟁자를 옴두꺼비라거나 반대 파벌 사람들을 바퀴벌레로 비하하는 등 온갖 막말로 스스로의 품격을 낮추고 소속 정당의 문화 수준을 떨어뜨렸다. 보수의 부끄러움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한국당은 더 이상 빨갱이 타령이나 하면서 극우적인 ‘안보 팔이 정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홍 대표는 당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자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러 의원이 “홍 대표의 막말과 극우 행태를 못 고치면 내년 지방선거는 폭망한다”고 걱정하고, 정우택 원내대표도 “정치인은 세 치 혀가 문제다. 잘못하면 사람의 마음을 벨 수 있다”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홍 대표가 할 일은 크게 세 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진보 집권 세력의 국정 운영에 대해 엄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첫 번째다. 권력에 취하고 이권을 탐하며 웰빙 체질에 안주해 있는 한국당의 부정적 유전자를 근원부터 제거하는 당 혁신이 두 번째 숙제다. 구심점과 지향점을 잃고 미래의 희망마저 상실한 듯한 보수 유권자층을 규합해 신보수주의의 가치를 새로 세우는 건 홍 대표의 세 번째 과제다.

첫 번째 여당 견제와 관련해 홍 대표의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다”는 태도는 바람직하다. 다만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의 대법원 최종심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자칫 문 대통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장애가 되지 않길 바란다. 두 번째 야당 재건과 관련해 친박 세력은 철저히 솎아내되 이를 악용해 홍준표 사당으로 변질시키는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 세 번째 신보수와 관련해 안보 보수, 산업화 보수의 전통 가치를 버리지 않되 이를 뛰어넘는 혁신 보수를 위한 거국적 토론을 바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