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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일자리 창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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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라이팅에디터·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라이팅에디터·고용노동선임기자

갑갑하다.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또다시 제왕이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 대통령선거 후보 토론을 보면서다. 소통 부재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어느새 상대에 대한 적의가 판친다. 다른 사람이 내놓은 건 무조건 반대하고 공격한다. 서로의 공약에 동의하는 광경은 이념적 동질성을 보일 때만 간간이 나온다. 그렇다고 공약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다 보니 선전·선동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내가 다 만든다”는 투의 절대권력 착각 벗어야 #일자리·소득주도성장론도 노동개혁 없인 안 돼

모든 후보가 하나같이 ‘일자리 창출’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먹고사는 데 일자리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그러니 최대 공약으로 삼는 건 당연하다. 한데 일자리 창출방식이 영 이상하다. “내가 다 만들겠다”다.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관료를 늘리겠다고 하고, 노조를 거꾸러뜨려 창출하겠다고도 한다. 중소기업 취업자에게 정부가 임금을 주는 방안도 나왔다. 물론 세금으로다. 느닷없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국내 기업을 “혁신이 부족하다”고 몰아세운다. 기업의 혁신마저도 “내가 대통령이 되면 주도하겠다”고 강변하는 듯 비친다.

대통령의 지위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투다. 지금까지 대선후보가 보여 준 태도만 보면 재임 동안 시장에서 만들어진 일자리에 대해 “그건 모조리 나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며 자화자찬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천동설적 발상이 시장에서 먹힐 리 없다.

일자리가 시장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상식이다.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타자수가 없어지고, 바리스타가 각광받는 것도 그런 원리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일자리는 그에 맞춰 변할 게다. 누구나 안다. 정작 대선후보에게선 이런 고민을 읽기 힘들다.

물론 모든 후보가 4차 산업혁명을 차기 정부의 새 성장동력으로 내걸었다. 한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노동 개혁은 필수다. 독일은 ‘하르츠 개혁’으로 혼돈의 세계 경제 속에서도 끄떡없다. 그런 독일이 최근엔 4차 산업혁명에 맞춰 ‘노동 4.0’이란 이름으로 고용시장을 바꾸려는 작업을 또 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소품종 대량생산시스템을 다품종 맞춤형 생산체제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체제에선 인사시스템이 바뀔 수밖에 없다. 집체식 고용 대신 전문화, 소집단 체제로 바뀐다. 부족한 건 외부에서 전문가를 구해 프로젝트로 맡기면 된다. 고용시장이 임금을 주고 직접 고용하는 체제에서 ‘계약에 의한 기술 빌리기’로 변한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건 불문가지다. 한국은 이미 경험하고 있다. 10억원어치의 생산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일자리 수(취업유발계수)만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 21.3이던 취업유발계수는 2014년 12.9로 반 토막 났다. 생산공정의 고도화 영향이다. 오죽하면 현대자동차 노조가 올해 단체협상에서 ‘고용총량 보장’을 들고 나왔겠는가. 더욱이 저숙련 근로자는 일자리 얻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런 소외계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맞는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어느 대선후보도 노동 개혁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배척해야 할 정책이 됐고, 공약으론 부적절한 적폐쯤으로 여긴다. 그러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니 어이가 없다.

노동 개혁 없이 소득 주도 성장론은 구호에 그칠 뿐이다. 일자리가 없는데 소득이 늘어날 리 없지 않은가.

노동 개혁은 제왕적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시장의 각 부문에 맡기고 조정해야 한다. 그러다 막히는 게 있으면 풀어서 흐르게 해 줘야 한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며 양떼몰이하듯 개입하면 일자리를 만들기 어렵다. 혹 창출되더라도 저임금 일자리처럼 눈속임형일 뿐이고, 기형적 고용 형태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선 지속 가능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의 선천성 기형경제인 무본억말(務本抑末·농업을 장려하고 상업과 공업은 억제하고 업신여기는 정책)과 유사한 기형적 고용시장을 만들 뿐이란 얘기다. 대선후보가 지금이라도 시장을 보기 바라는 이유다. 정치인의 지위를 조선시대에나 통할 법한 성리학적 우월적 지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김기찬 라이팅에디터 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