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데 못 치겠네, 제국의 흑마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류제국

류제국

흑마구(黑魔球). 속도는 느리지만 마술처럼 타자를 현혹하는 투구를 야구 팬들은 그렇게 부른다. 올 시즌 최고의 흑마구 투수는 류제국(34·LG)이다. 시속 140㎞에도 미치지 못하는 느린 공을 던지지만 등판할 때마다 승리를 따내기 때문이다.

LG 류제국, 올시즌 5차례 등판서 모두 승리 #구속은 떨어져도 자신감과 공 움직임으로 승부

류제국은 올 시즌 선발등판한 다섯 차례 모두에서 승리투수가 됐다. LG가 27일까지 올린 13승(10패) 중 4승을 그가 책임졌다. 평균자책점은 2.79(13위)이고, 4사구를 13개(3위) 내주는 동안 삼진은 35개(2위)나 잡아냈다. 탈삼진 기록을 보면 그는 전형적인 강속구 투수다.

고교 때 이미 150㎞를 뿌렸던 류제국은 20대 시절 빠른 공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가 심한 공을 던지며 타자를 속이고 있다. 직구 평균 스피드는 2015년 시속 142.5㎞였고, 지난해엔 시속 141.0㎞였다. 올해는 137.7㎞로 더 떨어졌다. 오른손 오버핸드 투수 중에선 김명신(두산)·윤성환(삼성)에 이어 류제국이 세 번째로 느린 공을 던진다.

LG 투수코치를 지낸 차명석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솔직히 말하면 류제국의 구위는 지난해보다 나쁘다. 언제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류제국도 "컨디션이 좋은 건 아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내가 가진 것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며 웃었다.

류제국의 공은 느리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다. 류제국이 "3볼-1스트라이크에서도 과감하게 가운데로 던진다"고 말할 정도다. 차명석 위원은 "류제국은 마운드에서 자기가 던지고 싶은 걸 100% 던진다. 컨디션이 나빠도 '타자가 내 공을 못 친다'는 믿음을 갖고 공을 뿌린다. 그렇게 힘차게, 정확하게 들어가는 공이 타자를 압도한다. 코치 시절 다른 건 몰라도 류제국에게는 심리적인 조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설명했다.

덕수고를 졸업하고 2002년 미국 프로야구 시카고 컵스에 입단한 류제국은 "미국에선 최고 시속 98마일(약 158㎞)까지 던져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전혀 다른 유형의 투수가 됐다. 공의 '속도'보다 '움직임'에 무게를 둔 것이다.

류제국의 빠른 공은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는 포심패스트볼이 아니다. 포심패스트볼보다 느리지만 타자 앞에서 미묘하게 변하는 투심패스트볼이 그의 주무기다. 올해는 컷패스트볼(직구와 슬라이더의 중간 형태) 비중도 늘렸다.

LG 시절 포수로서 류제국 공을 받아봤고, 지금은 다른 팀 타자로 류제국을 상대하는 윤요섭(35·kt)은 "류제국 공은 시속 140㎞도 되지 않지만 꺾이는 궤적이 좋다. 다른 투수들과 타자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말했다. 똑바로 날아오다가 타자 앞에서 휙 꺾이기 때문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류제국은 "어렸을 때 나는 5이닝 동안 100개를 던지며 삼진과 볼넷을 5~6개씩 기록하는 투수였다. 그러나 스피드에 대한 욕심은 미국에서 버렸다"며 "이제 생각을 바꿨다. 난 스피드로 싸우는 투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