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의식, 담당못할 약속 잔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선거를 앞두고 대권주자들의 경제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이 많은 공약들이 어느 정도실현성이 있을까. 4명의 대권주자들이 그간 연설이나 발언·회견등을 통해 밝힌 공약이나 견해등을 모아 견주어보면 서로간에 「그 말이 그 말」식인 대목들이 의외로 많음을 대번에 알수 있다.
이제까지의 경제가 성장과 안정에 치우친 나머지 분배문제에 소홀한 점이 많았다는 똑같은 현실진단에서부터 모두들 출발하고 있고 그런만큼 하나같이 분배문제에 역점을 둘것을 앞세우면서 동시에 성장과 안정, 자유시장경제원칙의 유지등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현재의 정책기조와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또한 여권후보든, 야권후보든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이른바「선성장, 후분배」정책이 당시로서는 타당성이 있었음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인정하고 있다.
경제의 현실인식에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은 역시 정치나 권력구조와 관련시켜 경제를 보는 눈이다.
김영삼총재는 「독재형 경제체제」나 「부채경제구조」라는 말을 자주 쓰면서「민족·민주·민생경제의 실현」을 내세우고있고, 김대중위원장은 「관권경제」「특혜경제」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대중이 주인이 되는 정의경제」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인식이나 주장은 정치적인 구호에 가깝지 경제의 틀을 새로이 잡아나간다는 방향전환과는 거리가 멀다.
노태우총재가 이야기하는 「경제불균형 시정」「관과 권력의 지나친 간여시정」등과 비교할때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와 표현에는 차이가 있어도 근본적인 경제 정책의 기조는 같다고 할수 있다.
몇가지 주목되는 것으로는 우선 김영삼총재가 예나 지금이나 「부채정제구조」를 우리경제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로 꼽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외자, 기업의 높은 부채비율, 농어가의 막대한 부채등을 지적하는 것인데, 최소한 외자문제에 관한한 최근의 흑자기조 전환이나 외자의 감소등 급변하는 경제상황을 볼때 김총재의 그같은 논리는 어느 정도 「낡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오히려 경제정책의 기조를 잡아나가기 위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흑자분중의 얼마만큼을 외자상환에 쓰고 나머지를 투자에 돌리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같은 시각에서 노총재의 「92년까지 채권국 전환」의 공약도 문제가 있다.
이는 공약이라기 보다 앞으로 매년 평균 50억∼60억달러의 흑자가 난다는 가정아래 그것이 외채상환에 쓰이든, 대외자산을 늘리는데 쓰이든 총외채에서 대외자산을 뺀 순외채는 없어지게 되어있다는 「전망」이다.
흑자분 사용의 걱정한 배분이라든지, 외자를 앞당겨 갚을때의 이해 득실이라든지 하는 문제들이 깊이 고려되지 않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비하면 김대중위원장의 논리는 흑자시대에 걸맞게 매우 기민한 「변신」을 하고있는 점이 눈에 띄는데, 최근 김위원장이 인터뷰등을 통해 피력하고 있는 견해를 보면 그 용어나 논리 전개의 틀이 그간 정부가 발표해온 일련의 「혹자관리대책」을 그대로 빼다 박은듯하다.
김종필총재니 김영삼총재는 공통적으로 현재의 경제개발계획을 「중장기경제사회전망체제」나「각계 각층이 참여하는 유도계획」으로 바꿔야한다는 주장을 펴고있는데, 이미 몇 년 전부터 5개년 계획은 꼭 이루어야하는 수치적 목표체제에서 벗어나 정책의 줄기를 잡아나가는 「전망」체제로 탈바꿈해오고 있으니만큼 역시 말은 달라도 그 내용은 현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밖에 「국내경제의 개방확대」는 유독 김대중위원장만이 다른 분야의 정책기조와 함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고, 노총재는 여권후보답게 92년까지 1인당 소득 5천달러, 농가소득 1천3백38만원, 중소기업의 제조업 생산비율 50%등 수치적인 뒷받침을 받은 공약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수치는 공약이라기보다 누구나 계산해보면 얻을수 있는 전망치에 가깝다.
오히려 최근의 환율변동추세로 보면 오는 91년에 앞당겨 1인당 농민소득 5천달러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크다.
다음으로 4후보의 경제공약에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것은 이들이 하나같이 근로자·중산층·영세업자에 대한 세경감을 약속하면서 공척부조제도 강화, 고등학교까지 자녀학비지원, 중학의무교육 조기실시, 의료보험 확대, 실업보험제도 도입, 농민연금제실시등 나랏돈이 뭉치로 들어가는 사업들을 공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가 느는만큼 세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권의 정치수요에 밀려 부분적인 무리를 안은채 추진되고 있는 현재의 복지시책(전국민의료보험·국민연금·최저임금제등)만을 계획대로 추진한다고 할때 재정이 부담해야 할돈은 87∼91년간 무려 6조1천3백32억원에 이른다는 것이 6차계획상의 시산이다.
다시 말하면 이만큼 하는 것도 현재의 우리 여력으로는 벅찰 지경인뎨 너나 할것 없이 책임질수 없는 복지를 계속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재원조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야권후보들이 입을 모아 약속하고 있는 농어촌부채 탕감이다.
김영삼총재나 김종필총재는 다같이 부채 탕감및 유예에 관한 특별조치법제정·획기적 대책마련등의 「제목」을 내걸었을뿐 구체적인 실행방법은 제시한 적이 없다.
김대중위원장은 좀 구체적으로 『매년 정부물자구매나 건설공사에서 5천억∼6천억원을 절감, 한 5년이면 빚을 탕감할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이 말은 『4천만 국민이 하루에 1백원씩만 저축하면 하루에 40억원』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발상이라고 할수 있다.
또 재원 문제는 둘째치고 농어민부채만 빚이고 도시 영세민의 부채는 빚이 아니냐는 형평의 문제, 금융의 근본질서등은 처음부터 도외시한 논리들이다.
결국 공약을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적어도 경제에 관한한 집권자에 따라 하루아침에 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진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않음을 새겨야할 때다. <김수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