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두 개의 헤어롤이 만들어낸 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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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홍상지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상지사회2부 기자

홍상지사회2부 기자

‘헤어롤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뒷머리에 헤어롤 두 개를 달고 출근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헤어롤에서 밤새 고뇌하고 긴장했을 이 권한대행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엄마, 누나, 부인의 일상을 봤다고 했다.

11일 촛불집회에 일부 시민들은 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나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이 권한대행의 헤어롤을 패러디한 사진이 잇따라 올라왔다. ‘알고 보니 두 개의 헤어롤이 만든 8이라는 숫자가 헌재 재판관들의 전원 일치 판결을 암시한 것이다’라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해석도 돌았다. 방식은 좀 달랐을지라도 모두 이 권한대행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국정 농단 사태에서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여성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일하는 한국 여성’과 거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언론을 통해 본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정유라씨 등의 상궤에서 벗어난 행태들이었다. 국회 청문회에 나와 모르쇠로 일관하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에서 거짓말이 들통난 이화여대의 여성 교수들도 국민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여성은 겉치레에만 신경쓰고 도덕적 문제에 둔감하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권한대행의 헤어롤은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끌었다. 이 권한대행은 평소에도 수수한 차림으로 헌법재판소에 출근했다. 탄핵심판 때문에 연일 방송에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을 알면서도 옅은 화장 외에는 이렇다 할 꾸밈이 없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만약 3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박 전 대통령이 머리에 헤어롤이 말려 있는 것도 모르고 오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나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가 원조 헤어롤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을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율도 급상승했을 것이다. 그 뒤 어지간한 잘못에는 국민들이 눈감아 줬을지도 모른다.

이 권한대행의 헤어롤이 빚어낸 광경은 묘한 불편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헤어롤이라는 소품이 빚어낸 대중의 과도한 관심이 내심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롤을 말고 출근한 건 대단한 실수는 아니었다. 사회생활이든 집안일이든 일하는 여성이라면 바쁠 때 한번쯤 해봤을 법한 평범한 실수였다. 하지만 두 개의 헤어롤이 지닌 상징성은 컸다.

나는 이 권한대행의 작은 실수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국정 농단 사태가 불러온 ‘이래서 여자는 안 돼’ 유의 여성비하 인식이 이 권한대행으로 인해 교정되기를 바란다. 미용사가 정성 들여 꾸민 헤어스타일보다 그의 소박한 모습이 훨씬 아름다웠다.

홍상지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