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백남준과 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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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백남준씨가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을 때 전통적인 아트의 영역에서 보자면 비디오와 텔레비전은 낯설다 못해 상종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상한 아트의 영역에 당시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르던 텔레비전을 밀어넣고 이를 뒤범벅시켜 새로운 아트를 창조해낸 것이야말로 백남준씨의 탁월함이고 천재성이었다. '비'는 베이징과 도쿄, 타이베이에서의 인기몰이에 머물지 않고 21세기 문화의 심장부인 뉴욕까지 문화의 다리를 놓으려 한다. 과정은 다르지만 경계를 허물려 하는 마음은 닮아 있다.

사실 백남준씨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 도쿄대에서 공부하고 독일에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코즈모폴리턴이었다. 그의 유해가 미국과 독일, 그리고 한국 등에 나뉘어 모셔질 것이라는 점도 그의 이런 면모를 반영한 것이다. 그 어렵던 시절 백남준씨가 예술적 성장을 위해 코즈모폴리턴의 길을 걸어야 했다면 '비'는 에둘러가지 않고 곧장 세계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 파워는 급성장했다.

시대를 앞서간 한국계 문화 소프트 파워의 선구자, 백남준씨. 그는 비록 뉴욕에서 벌어질 '비'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지만 같은 한국인이 새로운 문화적 소프트 파워를 갖고 세계무대의 중심, 뉴욕에 서게 된 것을 기뻐하며 영면했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비'의 성공적인 뉴욕공연도 기원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