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개편론 갑자기 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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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치 사전에 보조를 맞춘 듯 미국 학자와 정부관리들이 일제히 주한미군의 체체변경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발언 내용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구체화되어 있어서 이미 실천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23일 미 공보원에서 있었던 「래리·닉시」박사(미 의회 수석연구원)의 90년대 초 주한미군의 일부철수 가능성 시사도 이 같은 미국조야의 바뀌어진 현실인식을 반영한다.
「닉시」박사는 주한미군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방위관계 재조정 움직임은 ▲미국의 군비절감을 위한 감군 ▲한미통합군의 지휘권 이양 ▲소련의 군사력증강에 대비, 비상시 일본·필리핀·괌도 주둔군의 한국파견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시점에 한국사정에 정통한 미국의 원로 정치학자 「그레고리·헨더슨」씨 (전 주한 대사관 문정관)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9월24일자)에 같은 문제를 거론, 관심을 끌고 있다.
「한미간의 군사관계가 재조정되어야할 때」라는 기고문을 통해 그는 ▲한미 통합군의 작전지휘권 이양 ▲판문점에서의 대북한협상 당사자로서의 한국의 위치격상 ▲한반도 내 핵무기의 점진적 철수 ▲미군의 여단규모로의 3분의2 감축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한국내의 민주화가 진척됨에 따라 반미무드가 조성되고있다고 보고 한국인의 민족주의감정을 자극하는 현재의 주한미군체제를 바꿔야하는 단계에 와있다고 주장했다. 「헨더슨」씨는 특히 작전지휘권 문제에 언급, 아직도 미국이 한미연합사를 통해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고있는 것은 『전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통치권의 양보형태』라면서 이 문제가 보수적인 한국군부 장성들까지 불만을 갖게 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에 조인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한국대신 미국이 대북한협상테이블을 차지한 것이 어느새 24년이나 흘렀다면서 휴전협정을「평화조약」으로 바꾸고 한국을 미국과 동등한 대북한협상당사자로 격상시켜야한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같은 「그레고리·헨더슨」씨의 주한미군체제변경 논의는 지난 여름호 포린 어페어즈지에 기고한 전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씨의 상호감군 구상보다 훨씬 구체화된 형태다.
「글라이스틴」은 「한국-아시아의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 이후에 달라진 한국의 정치상황을 소개하면서 주한미군 점진철수의 필요성을 언급한바 있다.
그의 논리는 「헨더슨」씨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성장하는 힘과 민족주의 감정에 대처하여▲주한미군의 위상변경 ▲한미연합사 작전지휘권의 한국이양 필요 ▲「팀스피리트」훈련규모와 기간축소 ▲남북한 상호군축에 대한 한미간의 정책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미국 내 재야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듯 미 관리들의 주한미군 관계발언도 최근 들어 전례 없이 공개적이다. 국무성 「윌리엄·클라크」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가 17일 미 의회 「솔라즈」청문회에서 주한미군의 작전권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지난12일 내한한 「리처드·아미티지」 미 국방성 차관보도 같은 견해를 밝히면서 한국민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동일한 맥락에서 주한미군 재조정논의에 대한 미국조야의 바뀌어진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주한미군 문제를 다시 거론하게 된데는 88올림픽과 민주화진척에 따른 한국 내의 상황변화가 큰 변수가 되고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90년대 가서는 외국주둔 미군의 철수로 해결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미국 내부의 경비절감과 INF 타결에 따른 평화무드 측면에서 보는 시각(「다카오카」 미 스탠퍼드대 후버 연구소 연구원)도 있다. 어쨌든 최근의 주한미군 철수논의는 한미간의 갈등이 첨예했던 「카터」행정부 때와 다른 차원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필요로 한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미군부가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국정치에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군문제가 거론되어야 한다는 「아미티지」국방 차관보의 서울발언을 환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헨더슨」씨가 그의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한국민의 민족주의적 불평등 시정열기와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가 더 이상 주한미군의 문제를 기정사실로 덮어버릴 수만은 없다는 미국인들의 자각과 함께 이번 주한미군 철수논의의 1차적 배경이 되고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방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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