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얘기, 받아들일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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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한 후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얘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기존 정치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1일 반 전 총장은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교체를 이루고 국가 통합을 이루려 했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며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기자회견 직후 반 전 총장은 마포 사무실에서 보좌진과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반 전 총장은 대선 행보 중 안타까웠던 점을 털어놨다고 한다. 캠프 관계자에 따르면 반 전 총장은 “순수하고 소박한 뜻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너무 순수했던 것 같다”며 “정치인들의 눈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게 보이고 자꾸만 사람을 가르려고 하더라.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쪽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보수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 나는 보수지만 양심상 그런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빅텐트를 계획했던 반 전 총장이 기존 정치권에 대해 서운함을 내비친 대목이다.

그는 이어 그동안 도와준 캠프 보좌진에 “오늘 새벽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발표문을 만들었다.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미리 상의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캠프 사무실을 나서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앞으로 며칠 쉬며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다.

백민경 기자 baek.minkyung@joongang.co.kr

<반기문 대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 전문>

갑자기 요청한 기자회견에 대해서 여러분 많이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1월 12일 귀국한 이후 여러 지방 방문하여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을 만나고 민심을 들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또한 종교사회학계 및 정치분야의 여러 지도자들을 두루 만나 그분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난 모든 분들은 우리나라가 정치 안보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 위기에 처해있으며 오랫동안 잘못된 정치로 인해서 쌓여온 적폐가 더 이상은 외면하거나 방치해둘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들을 토로했습니다.

여기에 최근 최순실 사태와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한 국가리더십의 위기가 겹쳤습니다. 특히 이러한 민생과 안보, 경제 위기 난국 앞에서 정치지도자는 국민들이 믿고 맡긴 의무는 저버린 채 목전의 좁은 이해관계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대해 많은 분들이 개탄과 좌절감을 표명했습니다.

제가 10년 간 나라밖에서 지내면서 느껴왔던 우려가 피부로 와 닿는 시간이었습니다. 전세계를 돌면서 성공한 나라 실패한 나라를 보고 그들의 지도자들을 본 저로서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미력이나 몸을 던지겠다는 일념에서 정치에 투신할 것을 심각히 고려해왔습니다. 그리하여 갈갈이 찢어진 국론을 모아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협치와 분권의 정치문화를 이루어내겠다는 포부를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몸과 마음을 바친 지난 3주간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는 인격 살해에 가까운 음해, 각종 가짜 뉴스로 인해서 정치교체 명분은 실종되면서 오히려 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됨으로써 결국은 국민들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도 지극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이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저는 제가 주도하여 정치교체를 이루고 국가통합을 이루려 했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저도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저 자신에게 혹독한 질책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제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심경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서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결정으로 그동안 저를 열렬히 지지해주신 많은 국민 여러분과 그간 제게 따뜻한 조언을 해주신 분들 그리고 저를 도와 가까이서 함께 일해 온 많은 분들을 실망시켜드리게 된 점에 대해서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리며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루고자 했던 꿈과 비전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유아독존식의 태도도 버려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우리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해나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지난 10년간에 걸친 유엔사무총장으로서의 경험과 국제적 자산을 바탕으로 나라의 위기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헌신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가정에 부디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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