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제안 거부땐 모든 공직 사퇴|내각제가 옳다는 생각엔 변함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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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여러분들 그동안 고통스러웠지요. 전경들도 고생하고 학생들도 그 와중에서 고생했으며 국민여러분도 그 사정은 말할 것 없겠지요. 심지어 올림픽이 될까말까 걱정들도 많았고 IOC부위원장은 지금 서울에와 나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걱정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노태우민정당대표위원은 29일 낮 자신의 시국수습안을 밝힌 뒤 국립묘지와 현충사를 각각 참배하고 부근의 한 음식점 우산정에서 보도진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결단」 의 배경과 자신의 심경을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노대표는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오늘은 많이 먹어보자』 면서 단숨에 맥주한잔을 비워 그동안의 고통스러웠던 결단의 과정을 간접 표현했다.
노대표는 『오늘 현충사에 오게된 것은 어려운 시절 나라를 지키려한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하던 그 마음가짐을 잠시나마 느껴 보고 싶었고 그 당시의 역사와 미력하나마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충심에서였다』 고 술회했다.
-오늘의 시국수습안을 언제쯤 결심하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뭐라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지요. 내가 당원들을 향해 옥동자를 분만하기 위한 산고라고 수없이 강조해왔잖아요. 그러나 명실공히 옥동자란 무엇인가고 생각해 볼 때 결국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죠.
따라서 옳다고 생각해온 것 (내각제를 지칭하는 듯) 을 부르짖으면서 마음속에선 고통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 그 고통은 없어졌습니다.』
노대표는 묻지도 않은 말까지 단숨에 얘기하고 나서는『이제 맛이 난다』 고 맥주한잔을 또 들이켰다.
-대통령과는 사전에 전혀 상의가 없었습니까.
『내가 오늘 수습안을 밝히면서 「건의를 드리겠다」고 했지…. 그분도 내가 생각할 때 특별한 딴 생각은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이 만났던 사람들은 나도 다 만나보았고 그분도 같은 생각을 갖고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내 느낌인데 정작 어떨는지는 모르지…. 그러나 대통령각하께서 「난 정치권을 관여하지 않겠다」 고 한 만큼 정치에 관한 사항은 나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왔습니다.』
-결심을 굳히기까지에는 어떤 심경이었습니까.
『우리가 하늘을 쳐다보고 한점 부끄럼 없는 정치를 해야겠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시국수습안)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형편이라면 나는 일체의 공직에서 떠남은 물론 정치도 안 할 생각이었고 그것이 또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것뿐입니다.』
이때 동석했던 정선호의원과 천안-촌산지구당의 고문인 김용섭씨등이『대표위원의 시국수습안을 TV를 통해 직접 보면서 모두들 눈물겹게 경청했습니다. 당원들에게도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기필코 선거에서 승리하겠습니다』 고 하자 노대표는 『중요한 것은 진짜 공정하게 하는 것이지. 깨끗이 해보십시다. 겁날게 없어요』 라고 했다.
-대통령께는 언제 건의하실 생각입니까.
『건의를 올리기 위해서는 내 안이 당론으로 뒷받침되어야겠지요. 우선 당이 받아주어야 건의도 할 수 있어요. 오늘 하오2시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받들어주면 건의를 하게될 것입니다.』
노대표는 그러면서 언제쯤 건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변을 피했다.
-이제 내각책임제는 없어진 겁니까.
『어떤 분들은 아직도 내각 책임제를 관철하자고 합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죽더라도 내각제로 나가자는 그분들의 뜻에 나 역시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은 논리적인 것만으로는 안되는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약이라고 먹으라해도 환자가 안 먹겠다는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안먹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옳은 것이 되곤 하니까요.』
-직선제를 하면 선거에서 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동안 직선제를 배격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고 이기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직선제를 하면 여당에 하나도 불리 할게 없습니다. 그러나 직선제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정체시키거나 후퇴시켰던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내각제를 제안했던 것인데…. 공화당 정권때 유신에 대한 뼈사무친 거부감이 있었고 내손으로 대통령을 뽑고싶다는 감정, 이 소망이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내각제가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옳은 이야기지만 현시점에서의 국민적 기분은 내가 직접 뽑아야겠다는 것 아닙니까. 나는 국민의 참뜻을 그렇게 읽었고 그랬으면 그렇게 해야하는것 아닙니까.』
-직선제와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은 5공화국의 출범 과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까.
『그동안 고민 많이 했으니 밥좀 먹게 해주세요. 그런·얘기는 앞으로도 차차 하게될텐데.』
노대표는 이 대목에서는 다소 난처한 듯 대답을 회피했는데 서울의 이재형국회의장과 전화통화가 이루어져 간담회가 잠시 중단되었다. 노대표는 『아침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경황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의장님이 생각해 오신것을 늘 명심해서 제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의장님을 믿고 저지른 것입니다』 고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 노대표는 통화에서 「저지른다」는 표현을 여러차례 써 자신의 이날 결단이 사전 상의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뒷받침했는데 『지난주 수요일 대통령께서 김영삼씨를 만난 직후 이외엔 청와대를 방문한 사실이 없다』고 한 측근이 전언.
노대표는 이어 자청해서 자신의 심경을 밝혔는데 『정치란 대도한가운데 버티고 서있으면 다 아닙니까. 나는 기술이건 술책이건 아무 것도 모릅니다. 큰 길 한가운데 내가 서있고 그 길로만 가야한다는 것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고 덧붙였다.
-김영삼총재와는 언제쯤 만날 생각입니까.
『곧 만나게 되겠지요. 사실 그분을 만났었더라면 바로 내가 오늘 발표한 것들을 논의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고저쩌고 해서 그럴 기회가 없었지요』
노대표는 김민주당총재가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며 노-김 회담을 거부한데 대해 못내 서운했던지 이 대목에선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노대표는『여러분들은 자유민주주의만 지켜주십시오. 그것만은 지켜주셔야 합니다』면서 『오랜만에 이렇게 맑은 공기, 맛있는 음식을 먹게되니 퍽 후련합니다.』 고 홀가분한 기분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
노대표는 그러면서 『벼랑의 논리를 얘기하시더니 결국 돌아선 분은 노대표시군요』 라는 말에 『내가 돌아선 것은 아닙니다. 내각책임제를 아직 갖고 있어요.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국민이 원하는 것을 해야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고 했다.
노대표는 또 『조금 있으면 오히려 야당에서 내각제를 하자고 할 것입니다』 면서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내각제는 되는 것이겠지요』 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노대표는 이어 『김대중씨는 직선제가 되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경쟁자가 줄어들겠습니다』 고 하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난 잘 모르겠는데요』 라며 웃음.
노대표는 김대중씨와의 면담계획에 대해서도 『만나야지. 이제 내가 못 만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자신에 찬 표정이었다. <아산∥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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