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 백서 만들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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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건을 규탄하는 세 번째 촛불집회가 어제 서울광장 등 도심 곳곳에서 열렸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인 100만 명(경찰 추산 26만여 명)이 모인 이날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분노와 허탈감 속에서도 시민들은 절제된 모습으로 평화시위를 이어갔다. 법원이 이날 청와대 인근까지 시위대의 행진을 허용하면서 “특정 집단이 아닌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평화집회는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국가임을 증명한다”고 밝힌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사법부의 이번 결정은 주권자의 신뢰를 상실한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할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은 서울광장을 통해 분출된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향후 국가운영을 위한 협치(協治)의 방법을 찾는 데 주력해 줄 것을 촉구한다.

청와대도 “엄정하게 국민의 뜻을 경청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놔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이 터져나온 이후 한 달 가까이 국가기관의 행정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고 있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박 대통령이 내치는 물론 외교 및 국방 부문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자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벤처 및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들도 정부의 눈치보기식 행정조치 때문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 행정부의 시간은 이미 올스톱 된 것이나 다름없다.

시중에는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과 시민들의 계속된 집회를 경비하는 경찰만 업무를 보고 있다는 우습지만 슬픈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검찰은 이 정부 들어 국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으면서 어떤 일을 해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수남 검찰총장을 비롯한 수사팀은 최순실씨 사건을 통해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최씨와 최씨 측근, 청와대 전직 참모들에 대한 수사를 끝낸 뒤 박 대통령을 직접 검찰청으로 소환해 조사하는 강공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검찰이 ‘국민의 검찰’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사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박 대통령 출범 이후 기묘한 국정 난맥상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백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검찰이 투명하게 수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 국민의 의심을 사고 있는 검찰 수사가 정의롭고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 과정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최순실 백서가 필요한 이유다.

검찰은 특히 최근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소위 ‘우병우 사단’을 솎아내야 할 것이다. 현 정부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그 패거리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국가권력을 사익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 전 수석의 횡령 등 혐의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던 윤갑근 고검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정치권과 검찰 내부에서 우 전 수석의 측근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그는 여론의 비판에도 귀 닫고 눈감은 채 압수수색조차 하지 않고, 우 전 수석이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야 소환 조사했다. ‘팔짱 우병우’ 사진이 보여준 것처럼 황제 조사로 일관해 검찰조직의 신뢰를 떨어뜨린 장본인이다. 결국 최순실 수사팀이 114일 만에 우 전 수석의 자택을 압수수색했지만 그의 휴대전화는 이미 교체됐고,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찰 수사가 끝나고 도입될 특검은 윤 고검장 같은 부역세력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검사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경우 검찰의 신뢰 회복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박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의 출범을 앞두고 7대 재벌 총수들을 비공개로 만나 자본금 출연을 요구한 것을 비롯해 최씨가 청와대 회의의 의제를 설정하고 정·관계 인사에 개입한 의혹에 대해서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할 것이다. 최씨의 주치의인 성형외과 의사가 청와대에 드나들고 서울대병원 외래교수로 임명된 것은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1·12 항쟁’으로 기록될 시민들의 이번 집회가 헛되지 않으려면 이 사건에 임하는 검찰의 의식부터 달라져야 할 것이다. 차기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갈 백서는 향후 정치 지도자들의 지침서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민초들이 만들어가는 2016년 11월의 전설에 검찰도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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