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머리에 뱀꼬리"의 격리 전작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일일드라머사상 최초의 전작제를 선언하고 지난4월14일 출범한 KBS제1TV의 『여심』(이은성극본·황은진연출)이 26일 1백67회로 그 긴여정을 끝냈다.
「최초의 전작제」란 이유하나만으로도 비교적 후한평가를 받았던 『여심』은 사실상 하루하루 만들기에 급급했던 TV드라머의 제작수준을 한단계 높인 것은 부인할수 없으나 불필요하게 받은 찬사는 시청자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상적인 의미에서 전작제란 드라머를 모두 만들어놓고 매회 일정분량씩 끊어 방영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러나 미니시리즈도 아닌 일일극에서, 그것도 열악한 국내TV드라머 여건속에서는 통칭「극본이 완성된 드라머」를 「전작드라머」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이 관대한 시각에서 보더라도 『여심』은 전작드라머라고 부르기 어렵다. 『여심』이 중반이후의 구상은 추상적으로 짜여진 상태에서 30회 정도 미리 찍어놓은 드라머였다는 것이 곧 확인됐기 때문이다.
사전 제작해두었던 겨울장면등의 야외촬영과 속도감있는 초반 스토리전개가 크게 돋보였던 『여심』은 그러나 30여회를 넘어서면서부터 극본자체가 갈팡질팡하기 시작, 1∼2주정도 미리쓰고 만드는 드라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 해방이후 현대까지를 살아온 한여인(송다영)의 일생을 통해 보수성과 현대성의 역학관계를 정립하는 「한국적 여인상」을 그려보겠다는 기획의도는 갑자기 허물어졌으며,『여심』의 핵심을 차지했어야했던 「드라머의 사회성」또한 실종돼 주제도, 시대상황묘사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줄수 있는 삶」은 갈등이 있어야한다. 특히「사회적 갈등」은 주인공의가치관과 충돌, 제3의 창조적 가치관을 낳는다. 『여심」도 처음에는 8·15, 6·25등의 적절한 사회적 갈등소재를 갖고 출발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영이 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말았다는「가족사적 배경」으로만 활용됐을 뿐 드라머의 깊이에 필요한「사회적 갈등」으로는 진전되지 못했다.
처음 구상에 따르면 『여심』은 홀아비 정치가의 후취자리를 선택하는 옥영, 양로원에서 죽어가야했던 다영 모, 자유당 부패정치가밑에서 정치깡패짓을 하다 자결하는 덕대, 옥영의 배신을 부로, 복수하는 효섭모자등 만만치 않은 역할들로 짜여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기역할을 떠나 다영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들만 엮어냄으로써 『여심』을 느린 템포의 가정극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이 같은 변화에는 방송사외적인 소재 제약의 탓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전작을 집필하지 못한 극작가의 잘못이 크다. 그 결과 『여심』은 사회성의 상실→진지한 갈등소재 고갈→신변잡기식 진행→느린 템포라는 운명을 겪은 끝에 당초 60대까지 그리기로 했던 다영을 30대까지만 묘사하면서 어정정한내용상의 도중하차를 하고 말았다.
26일의 마지막회에서도 『여심』은『이 드라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하는 의문만 남긴채 끝을 맺었다. 『여심』이 최소한의 주제였던 여성의 보수성 (재혼을 안한다)과 현대성(재혼을 한다)문제를 놓고 그 어느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드라머의 여운」을 남긴다는 명분아래 이 드라머가 끝끝내 극방향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희애라는 스타를 발굴해내기도 했던 『여심』『노다지』『세월』로 이어지는「전작제시도」의 첫 주자가됨으로써 TV드라머사에 한획을 그은 노작으로 평가될 것임은 분명하다. 되풀이 말하지만 극본이 완성된 후「전작제」라고 자랑하자. <기형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